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광주-전남, 대전-충남, 부산-경남 등 행정 통합 논의가 활발하다. 문제는 기준이다. 무엇을 기준으로 통합을 추진해야 하는 것일까.
현재 논의의 중심은 규모와 효율이다. 수도권에 대응하려면 메가시티가 필요하고, 인구를 집적시켜야 하며, 행정 비용을 절감하고 국비 확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논리다. 산업 생태계를 통합하면 시너지가 나고, 지방 소멸을 막으려면 광역화가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핵심을 놓치고 있다. 현재 지역의 문제는 돈이나 규모가 아니라 문제해결 능력이다. 규모와 관계없이 자생적 지역 산업을 개척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예산이나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규모만 키우고 정체성이 약해지면 문제해결 의지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 억지로 합친 대도시와 농촌 지역 사이에서 '빨대 효과'나 '형식적 통합, 실질적 종속'에 대한 우려가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이유다.
그래서 나는 정체성을 행정 통합의 기준으로 제안한다. 공동체 의식이 강해야 지역문제 해결 의지가 생긴다. 제조업 중심에서 지식·문화·서비스 산업으로 경제 구조가 변화하면서 규모의 경제보다 정체성의 일관성이 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제조업 시대에는 규모가 경쟁력이었지만, 지금은 고유한 정체성이 경쟁력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정체성이란 단순한 이미지나 자부심이 아니다.
① 지역 내부 구성원이 공유하는 서사,
② 외부에서 인식되는 상징성과 이미지,
③ 이를 일상적으로 재생산하는 문화·산업·공간의 결합을 의미한다.
이 세 요소가 결합될 때 정체성은 추상이 아니라 실제 작동하는 힘이 된다.
핵심은 현재 각 지역이 갖고 있는 문화 정체성의 강약이다. 문화 구심점이 있어 독자적 정체성이 확립된 지역은 ‘강’, 그렇지 못한 지역은 ‘약’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판단하는 기준은 단순하다. 전국 단위에서 인식되는 대표 이미지가 있는가, 지역을 상징하는 문화·산업·공간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다수 긍정할 수 있다면 ‘강’, 그렇지 못하다면 ‘약’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세 가지 경우의 수가 나온다.
강–강: 둘 다 강한 문화 정체성 → 현행 유지
강–약: 한쪽은 강하고 한쪽은 약함 → 통합
약–약: 둘 다 약한 문화 정체성 → 통합
논리는 단순하다. 강–약의 경우 강한 쪽이 문화 구심점이 되어 광역 전체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 약–약의 경우 통합을 통해 새로운 문화 구심점을 만들어야 한다. 반면 강–강의 경우는 다르다. 각자 독자적 문화 정체성으로 이미 잘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억지로 통합하면 새로운 광역 정체성을 만드는 데 막대한 자원이 소모되고, 기존의 강한 정체성들이 오히려 약화될 수 있다. 현행 유지가 합리적이다.
이제 각 지역의 상황을 살펴보자.
광주-전남은 광주(강)-전남(약) 구조다. 광주는 1986년 분리 이후에도 호남의 문화 중심지로 명확한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민주화의 도시, 예향이라는 상징은 지금도 유효하다. 반면 전남은 목포, 순천, 여수 등 개별 도시들은 존재하지만 전남 전체를 아우르는 문화 구심점은 형성되지 못했다. 이 경우 통합은 자연스럽다.
대전-세종-충남은 약-약-약 구조다. 대전은 1989년 분리되었지만 독자적 문화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했다. 세종은 2012년 출범한 인위적 도시로, 행정 기능은 집중되었지만 역사적 서사나 고유문화는 형성되지 못했다. 충남 역시 천안, 아산, 공주 등 개별 도시는 있으나 충남 전체를 대표하는 문화 중심지는 부재하다. 이 경우 통합을 통해 새로운 문화 구심점을 형성해야 한다.
대구-경북은 대구(강)-경북(약) 구조다. 대구는 1981년 분리 이후 독자적 대도시 정체성을 확립했다. 반면 경북은 포항, 구미, 안동, 경주 등 각자의 역사와 자산은 풍부하지만, 경북 전체를 하나로 묶는 문화 중심지는 없다. 통합이 합리적이다.
부산-울산-경남은 부산(강)-울산(약)-경남(약) 구조다. 부산은 1963년 분리 이후에도 해양도시, 영화의 전당, 자갈치시장, 부산 사투리 등 뚜렷한 정체성을 유지하며 영남권 전체의 강력한 문화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울산은 1997년 분리 이후 산업도시로 성장했지만 전국적으로 인식되는 문화 구심점으로 기능하기에는 부족하다. 경남 역시 창원, 진주, 김해 등 개별 도시는 있으나 경남 전체를 대표하는 문화 중심지는 없다. 이 경우 부산이 부울경 전체의 문화 구심점, 즉 공동의 기준점 역할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통합을 논의하는 것이 타당하다.
결과적으로 보면 현재 논의되는 모든 지역은 통합 방향으로 검토하는 것이 맞다. 1963년 이후 추진된 광역 단위 행정 분리는 문화 구심점의 중요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새로 분리된 지역이 스스로를 앵커 할 수 있는 문화 중심지를 갖추었는지 묻지 않은 채, 과거 그 역할을 수행하던 대도시와 분리시킨 것이다.
통합 후 숙제는 남아있다. 통합을 통해 광역 전체의 정체성을 높이는 동시에, 광역에 속한 소도시들의 정체성 또한 제고해야 한다. 이는 다른 글에서 논의한 '온전체 메가폴리스' 개념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다. 온전체 메가폴리스란 '중심부-소도시-광역' 모두가 강한 대도시권을 말한다.
광역 단위에서는 정체성 기준이 통합을 지지하지만, 기초 단체에서는 정반대 결론이 나올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창원이다. 2010년 창원, 마산, 진해가 통합 창원시로 합쳐졌다. 당시 행정 효율과 규모의 경제를 명분으로 추진되었지만, 15년이 지난 지금도 각 도시의 정체성은 강-강-강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창원은 공업도시, 마산은 근대·항구도시, 진해는 해군·벚꽃 도시로서의 고유한 정체성이 여전히 살아있다. 이 경우 오히려 다시 3개 기초단체로 분리하는 것이 정체성 기준에 부합한다.
물론 행정 통합에 정답은 없다. 다만 현재 논의에서 누락된 정체성 논의를 복원하지 않으면 방향을 잡기 어렵다. 행정 통합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통합을 통해 문화 구심점이 형성되고, 이후 하위 권역의 정체성이 다시 축적된다면 행정 구조는 재조정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무엇을 중심으로 함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