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편의 글에서 저는 정체성을 중심으로 행정 통합을 논의해 왔습니다. 광역 통합의 기준은 무엇인가(1편), 미국의 지역 정체성은 어떻게 작동하는가(2편), 다층적 지역 정체성을 통합하는 온존체 메가폴리스란 무엇인가(3편), 왜 한국은 시군구는 강하고 광역은 약한가(4편)를 차례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다룰 주제는 지역 정체성의 최상위 층위, 즉 국가발전축입니다. 정체성은 단일한 스케일에서 형성되지 않습니다. 마을에서 출발해 읍면동, 시군구, 광역, 초광역으로 확장되고, 이재명 정부가 제안한 3대 수도축(행정수도·경제수도·해양수도)을 거쳐, 최종적으로 국가발전축에 이릅니다. 지역발전을 위해서는 이 모든 층위의 정체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국가발전축은 단연 경부축입니다. 1960년대 이후 서울–대전–대구–부산을 잇는 경부축을 따라 고속도로와 고속철도, 중공업과 대기업 본사가 집중되었습니다. ‘경부선’이라는 말 자체가 발전의 상징이 되었고, 경부축은 단순한 교통망을 넘어 60년 넘게 작동해 온 한국의 최상위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역발전이 산업화를 상징하는 경부축 하나로 충분할까요. 이제는 더 많은 축이 형성되어 새로운 발전 전략의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제안된 대안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구상이 바로 강호축입니다. 2018년 이시종 충북지사는 한 신문 칼럼에서 강원–충북–호남을 연결하는 강호축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현재 이 축이 교통과 교류가 단절되어 있어 “강원과 호남 간에는 친구도 동창도 사돈도 많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지사는 강호축이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이라는 공통 과제를 안고 있지만, 동해안–내륙–서남해안을 잇는 지리적 연결성을 바탕으로 경부축의 중후장대 산업과는 다른, 첨단 산업과 자연·휴식 중심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남북 평화 시대가 열리면 원산–시베리아–유럽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길도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9/27/2018092702062.html
강호축이 아직 ‘계획’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한국 로컬을 주도하는 축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강원, 충북, 전북, 전남, 제주에서 로컬 크리에이터와 브랜드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강호축은 만들어야 할 미래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 사회적으로 널리 인식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호축 외에도 또 다른 발전축의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2026년 꼭 가봐야 할 장소 52곳 가운데 하나로 한국의 동서 트레일(Dongseo Trail)을 45위에 선정했습니다. 충남 태안 안면도에서 경북 울진까지 849km를 횡단하는 한국 최초의 장거리 도보 여행길입니다.
강호축이 남북 방향의 종축이라면, 동서 트레일은 아직 충분히 실험되지 않은 횡축입니다. 현재는 여행길의 성격이 강하지만, 활용 방식에 따라 그 축을 중심으로 새로운 산업망과 지역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도 있습니다. 지역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걷고 연결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서 형성됩니다. 경로와 서사가 축적될 때 새로운 정체성과 산업축이 탄생합니다.
https://www.nytimes.com/interactive/2026/travel/places-to-travel-destinations-2026.html
경부축, 강호축, 동서축이 단순한 교통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정체성의 축으로 작동할 때, 지역발전은 특정 거점에 집중되지 않고 국토 전반으로 촘촘히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은 모든 층위의 정체성이 함께 강할 때 가능해집니다.
마을, 읍면동, 시군구, 광역, 초광역, 3대 수도축, 그리고 국가발전축. 어느 하나라도 약하면 지역은 온전히 설 수 없습니다. 국가발전축 논의로 행정 통합 시리즈를 마무리합니다.
1편 https://brunch.co.kr/@riglobalization/1708
2편 https://brunch.co.kr/@riglobalization/1711
3편 https://blog.naver.com/yeonhui1000/224142464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