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도시가 보헤미안이 모이는 도시가 되고 싶어 한다. 그만큼 창조도시에서 예술가의 창의성과 감성이 중요해졌다. 그런데 정작 예술가가 어떤 도시를 좋아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예술가에게 예술가의 도시가 어디인지 물었다.명확한 답을 주는 예술가가 없었다. 평창동에서 만난 한 화랑 주인은 프랑스 남부의 생폴 드 방스(Saint Paul de Vence)를 추천했다. 검색해보니 이곳은 파주의 헤이리와 같은 작은 예술가 마을이었다. 샤갈, 르누아르, 마네, 마티스, 브라크,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 수많은 예술가가 여름을 보낸 유서 깊은 마을이지만 독립적인 예술가 도시와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자족적인 예술가 도시를 찾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현대 도시에서 예술가는 도시를 구성하는 수많은 직업의 하나다. 예술가가 다수인 또는 주도하는 도시는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보통 보헤미안 도시하면 파리 생제르맹 데프레,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 등 대도시 안의 문화지구를 연상한다.
이제 사라진 1960년대 보헤미안 지구
작가라면 한 번쯤은 이런 문화지구에서 글을 쓰고 다른 작가와 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작가는 유난히 도시의 한 모퉁이에 모여 사는 것을 좋아하는 듯하다. 프랑스 가톨릭 신학자 앙토냉 세르티양주(Antonin Sertillanges)가 '공부하는 삶 The Intellectual Life'에서 지적했듯이 속세와 떨어져 홀로 외로이 창작하는 작가에게 다른 작가와의 교류는 작가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활력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들이 선호하는 동네는 일반적으로 지식과 예술의 생산과 공유가 가능하고 물가가 저렴한 지역이다. 대학과 가까이에 있는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나 파리의 생제르맹 데프레가 한때 작가의 거리로 유명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서울도 지역문화 전통을 올바르게 계승했다면 대학가인 동숭동과 신촌이 예술가와 지식인의 동네로 성장했을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보헤미안 지구가 음악가나 화가보다는 작가와 지식인 중심으로 형성됐다는 사실이다.일반적으로 공연장, 미술관 등대규모 문화시설이 밀집된 지역에는 보헤미안 지구가 들어서지않는다. 예술가와 작가가 모이고 모여 사는 보헤미안 지역은 대규모 문화시설보다는 카페, 서점, 술집 등 상업시설이 집적된 곳이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1960년대 보헤미안 도시는 사라지는 추세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아나키즘, 동성애 주의 등 현대사회의 모든 사상이 유래했다는 뉴욕의 웨스트 빌리지도 이제 부유층 주거지역에 불과하다고 비판받는다. 작가 지망생과 여행객이 유명 작가를 만나기 위해 생제르맹 데프레의 카페를 기웃거리는 것도 1960년대의 추억으로 남았다.
부르주아, 힙스터, 보보 지역과 달리 보헤미안 지구가 더 이상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보헤미안' 지역이 전 도시로 확산됐기 때문이다. 뉴욕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니치 빌리지의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예술가들은 처음에는 이스트 빌리지, 첼시 등 맨해튼의 다른 지역, 그다음에는 브루클린, 브롱스, 퀸즈 등 뉴욕 전역으로 진출했고, 그 과정에서 힙스터 지역으로 알려진 새로운 '보헤미안' 동네가 수없이 만들어졌다.
리처드 플로리다가 제기한 창조도시론도 보헤미안 지구의 확산을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보헤미안이 매력적인 도시문화와 문화지구를 창조하자 스타트업, 소상공인 등 창조인재와 창조기업이 보헤미안 지구로 몰리는 것이다. 창조인재 집적 현상이 도시 전체에서 일어난 도시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창조도시다.
작가 도시의 귀환
상업적인 힙스터 지구가 확산되는 트렌드 속에 최근 뉴욕의 한 지역이 많은 작가가 거주하고 창작하는 ‘작가의 도시’로 돌아왔다. 바로 뉴욕의 독립서점, 독립출판의 중심지로 부상한 브루클린이다.
세 집 중에 적어도 한 집은 소설가가 산다고 할 정도로 소설가들이 많이 산다는 브루클린. 비평가 에런 히클린(Aaron Hicklin)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미국에서 작가로 성공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 조건은 유명 대학의 문예창작 석사학위(Masters of Fine Arts)고, 두 번째는 브루클린 정착이다. 학위를 받은 후 소설가로 성공하기 위해 브루클린으로 이주하는 작가가 많기 때문에 이런 풍자가 나왔다. 뉴욕 언론은 여행자에게 미국 현대 문학의 거장을 거리에서 만나고 싶다면 브루클린 독립서점 여행을 떠나라고 조언한다.
왜 브루클린인가. 맨해튼에서 강 건너 거리인 브루클린은 19세기부터 유명 작가들의 거주지였다. 처음 작가들이 처음 정착한 곳이 맨해튼과 가장 가까운 브루클린 하이츠다. 여기에서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이 '브루클린 이글 The Brooklyn Eagle'이라는 잡지를 편집했고, 노만 메일러(Norman Mailer)와 트루먼 카포트(Truman Capote)가 친구들을 모아 토론했다. 하지만 브루클린이 맨해튼을 제치고 문학 중심지로 부상한 시기는 최근이다. 마틴 에이미스(Martin Amis),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 제니퍼 이건(Jennifer Egan), 조너선 사프란 포어(Jonathan Safran Foer) 등은 1980년대 이후, 그러니까 브루클린이 젠트리파이된 후 정착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특색 있는 문화다. 뉴욕은 버로우(Borough, 자치구)로 불리는 다섯 개 행정 구역으로 나뉘며, 브루클린도 다른 버로우와 마찬가지로 독특한 억양과 문화를 가진 하나의 도시로 기능한다. 브루클린 문화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키워드는 대안(Alternative)이다. 맨해튼이 주류 문화를 상징한다면, 브루클린은 예술가와 작가에게 물질적, 문학적 대안을 의미한다.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사고가 가능한 대안적인 장소에서 문학이 꽃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성공 요인은 지역 자부심으로 하나가 된 작가와 독자들로부터 찾을 수 있다. 브루클린의 작가들은 유별나게 출신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특히 현존하는 미국 최고의 작가로 칭송받는 폴 오스터(Paul Auster)의 브루클린 사랑은 남다르다. 그는 브루클린에 거주하며 그곳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많이 썼다. 2005년작 '브루클린 풍자극 The Brooklyn Follies'이 보여주듯이 그는 제목에까지 브루클린을 차용하며, 브루클린에 대한 사랑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독립서점이 작가 도시의 구심점
이 지역 문학 공동체의 중심은 독립서점이다. 독립서점들이 지역 작가와 독자를 연결한 새로운 출판문화와 공동체 문화를 창조했다. 2014년 '브루클린 매거진'에 20개 이상의 주요 서점이 소개될 정도로 독립서점은 지역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독립서점들은 지역 작가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한다. 브루클린 북 페스티벌 기간에는 저명 작가를 초대해 독서회와 저자 사인회를 연다. 평상시에도 거의 매일 독서회를 열고 커뮤니티 행사를 통해 브루클린 작가들의 작품을 홍보하고 판매한다.
브루클린에서 처음으로 독립서점을 연 가게는 파크 슬로프에 위치한 커뮤니티 북스토어다. 이 차분하고 세련된 서점은 지역사회의 구심점이자 폴 오스터, 시리 허스트베트(Siri Hustvedt), 니콜 크라우스(Nicole Krauss)가 자주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토론하고 다양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면 작가의 도시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지역의 유능한 작가를 발굴하고 독자와 직접 소통하도록 연결해주는 독립서점이 가득한 브루클린을, 우리는 문학 중심지로 여긴다.
브루클린의 독립서점은 적극적으로 지역주의(Localism) 전략을 추구한다. 이러한 특징은 서점 문만 열고 들어가도 금방 느낄 수 있다. 희귀본과 절판본을 전문으로 하는 덤보의 독립서점 피에스 북샵은 문 옆에 브루클린 기념품 전시대를 배치한다. 기념품에는 브루클린 작가의 작품도 포함돼 있다.
독립서점은 지역 독자와 작가가 만나고 대화하는 일종의 사랑방이다. 독자들은 독립서점에서 인터넷 쇼핑이 제공하지 못하는 문화와 가치를 체험할 수 있다. 다양한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은 작가에게 중요하다. 그들의 경험과 스토리가 작품의 소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중고 소설책을 파는 서점으로 유명한 윌리엄스버그의 북서그네이션은 더 적극적인 지역사회 연계 전략을 추구한다.
지역 작가를 지원하는 것 외에도 서점 공간을 다양한 지역사회 행사 공간으로 대여해 지역 공동체 발전에 기여한다. 독립서점뿐만이 아니다. 유통업계 전체가 인터넷 쇼핑으로 사슬이 풀린 소비자를 한 곳에 묶어 놓는 방법을 찾고 있다. 특히 은행, 커피전문점, 슈퍼마켓 등 지역에 매장을 가진 기업들이 공유 공간을 넓혀 동네 생활의 중심지, 동네 비즈니스의 플랫폼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독립서점은 브루클린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도서 시장의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2009년과 2014년 사이 미국의 독립서점 수는 30퍼센트 증가했다. 독립서점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 계기는 대형 서점의 불황이었다. 온라인 서점의 부상으로 2011년 대형서점 보더스가 파산했고, 반즈 앤 노블도 2009년과 2014년 사이 60개 이상의 매장을 폐쇄했다.
'위크 The Week' 매거진의 제시카 헐링거(Jessica Hullinger)는 독립서점의 경쟁력을 특별한 체험 제공, 맞춤형 도서 추천, 상품의 다변화, 지역 공동체 구축 등 네 가지로 설명했다. 작은 도시의 독립서점은 개인 맞춤형, 지역 커뮤니티 비즈니스 모델로 대형 서점과 경쟁한다. '뉴욕타임스'가 2016년 보도한 미 중서부의 한 독립서점은 무려 1,500명의 고객을 개별적으로 관리한다. 등록한 고객에게 매달 추천 도서를 이메일로 보내고, 구매 도서에 할인 혜택을 준다.
지역을 기반으로 작가와 독자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독립서점과 독립출판사가 전반적으로 침체된 출판업계를 구할 수 있을까? 독립출판은 3D 프린팅, SNS, 인공지능 등의 기술 혁신 덕분에 출판과 마케팅 비용이 현격히 떨어지면서 상업성이 높아져 더욱 주목받고 있다. 지식인과 작가는 상업 출판사와 일하지 않아도 책을 쓰고 팔 수 있게 됐다. 독립출판은 이제 시작 단계다. 서점, 출판사, 작가, 소비자를 연결하고, 공동체를 구축하는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계속 발굴해야만 독립출판이 대규모 상업출판과 경쟁할 만큼 성장할 수 있다.
한국의 보헤미안 도시는 어디에
한국에서도 홍대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서점과 독립출판 클러스터가 형성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독립서점과 같이, 동네 거점으로서 주민에게 특별한 책을 소개하고 동네에서 구하기 어려운 문구류나 아트상품을 판매한다. 과연 홍대가 한국의 브루클린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땡스북스, 유어마인드, 북티크 등 홍대 독립서점 시장을 개척한 1세대 서점의 최근 동향을 보면 보헤미안 지구로서 홍대의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다. 이들 모두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규모를 줄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생태계다. 독립서점과 독립 출판사가 영업하는 장소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정한 의미의 브루클린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작가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구축이 필요하다. 주민들이 책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누고 독서를 즐기며,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통해 글을 쓰는 작가들이 많은 지역 문학 공동체가 작가의 도시 브루클린을 만들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인사동, 서촌, 삼청동등 서울에는 홍대 말고도 고전적인 의미의 보헤미안 지역이 남아있다. 그러나 보헤미안 정체성을 오랫동안 유지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상업적 골목상권이 그 지역 안에서 계속 확장하기 때문이다.
홍대와 마찬가지로 다른 보헤미안 지역에 필요한 것은 생태계다. 작가가 모이고, 이들이 집단지성을 발휘할 수 있는 커뮤니티와 이를 지원하는 문화시설을 도심에서 떨어진 외진 장소가 아닌 도심의 보헤미안 지역에 집적시켜야 한다. 보헤미안 도시의 경쟁력은 궁극적으로 문화자원과 이를 통해 형성된 정체성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