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목길 경제학자 Apr 25. 2020

텍사스 독립정신과 진보주의가 결합된 오스틴의 창조문화

오스틴은 미국에서 ‘오지’라고 볼 수 있는 텍사스의 수도다. 지도에서 텍사스는 미국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인이 사는 대서양과 태평양 연안에서 적어도 3000킬로미터 떨어진 완전한 ‘내륙’이다. 텍사스가 고립되어 있어서인지 미국 사람조차도 텍사스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영화 '폭로(Disclosure)'에는 텍사스를 낯설어하는 미국인의 인식이 잘 드러난다.


주인공 톰 샌더스는 회사 동료 메리더스 존슨의 유혹에 넘어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 샌더스가 존슨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거부하자, 존슨은 앙심을 품고 그를 성추행범으로 고소한다. 회사는 궁지에 몰린 샌더스를 오스틴 지사로 전보 발령을 낸다. 여기서 이 소식을 들은 샌더스 아내의 반응이 흥미롭다. “오스틴……? 거기는 텍사스 아닌가요?” 시애틀과 같은 세련된 도시에서 살던 샌더스 아내는 텍사스에서의 삶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텍사스는 다른 지역 사람, 특히 엘리트들에게는 인기가 없다. 황량한 사막, 카우보이, 가난한 이민자, 거친 문화 등의 이미지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까닭이다. 그런데 과연 텍사스가 그런 곳일까?


텍사스는 뉴욕, 캘리포니아와 더불어 미국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를 주도하는 영향력이 큰 주 중 하나다. 캘리포니아와 텍사스는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도시로 항상 경쟁하는 사이다. 캘리포니아가 민주당을 지지하는 블루 스테이트(Blue State)의 대표 주자라면, 텍사스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레드 스테이트(Red State)를 이끈다. 경제 성장으로만 보면, 현재 텍사스가 캘리포니아와의 경쟁에서 앞서고 있다. 재정 위기와 과도한 규제로 저성장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캘리포니아와 달리 텍사스는 지난 10년간 미국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빠르게 경제 성장을 일구고 있다 (2014년 현재).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국 동부나 서부의 엘리트는 텍사스의 물질적인 성과에 크게 감동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텍사스 문화는 그저 1980년대 TV 드라마 댈러스 Dallas의 등장인물 제이알 유잉(J.R. Ewing) 같은 졸부가 만들어낸 천박한 문화로 치부될 뿐이다. 그러나 고상한 미국인이 간과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들이 사랑하는 홀푸드마켓과 니만 마커스(Nieman Marcus) 백화점의 고향이 텍사스라는 사실.


홀푸드마켓과 니만 마커스는 미국에서 ‘수준 높은’ 도시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대표적인 ‘상류 라이프스타일’ 상점이다. 홀푸드마켓은 오스틴에서, 니만 마커스는 댈러스에서 시작하고 성장했다. 두 기업의 본사는 아직도 자신이 태어난 도시에 있다.




친환경 자연식품의 대표 기업 홀푸드마켓


오스틴 중심 거리인 6번가는 라이브 음악 바, 음식점, 부티크 상점이 즐비한 번화가다. 도심에서 6번가를 따라 서쪽으로 3.2킬로미터를 가면 노스러마(North Lamar) 거리와 만난다. 그 사거리 왼편에 주변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큰 건물이 있다. 미국, 아니 전 세계의 자연식품 시장을 선도하는 홀푸드마켓의 본사 건물이다.


홀푸드마켓은 2014년 현재 미국과 유럽에서 총 370여 개의 점포를 운영한다. 2012년에는 110억 달러가 넘는 매출을 기록했고, 7만 4000여 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앞으로 매장 개수는 1000개로 늘어날 예정이다. 회사의 기업 평판은 미국 최고 수준이다. 미국의 경제지 포춘(Fortune)은 16년 연속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의 순위에 홀푸드마켓을 꼽았다.


본사 건물 1층이 본점이다. 본점답게 매장의 규모는 약 743제곱미터로 상당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홀푸드마켓 본점은 예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눈에 띄는 차이점은 와인 바, 맥주 바, 시푸드 스탠드 등 전에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스탠드였다. 내가 오스틴에 거주했던 1990년대 초반에는 커피와 제과류를 파는 카페만이 매장 내부에 존재하는 유일한 식당이었다. 이 본점은 바로 길 건너에 있었던 예전 본점을 옮긴 것이다. 1990년에 개장한 이전 본점은 타지의 관광객에게 자랑할 만큼 규모가 컸고 다양한 상품을 판매했다. 홀푸드마켓이 미국 전역으로 퍼지자 다른 도시에서도 오스틴 본점만큼, 아니 본점보다 더 크고 화려한 매장을 찾을 수 있다.


뉴욕 맨해튼에서도 홀푸드마켓은 뉴요커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맨해튼에서 제일 큰 식료품 가게도 바우어리스트리트에 있는 홀푸드마켓 매장이다. 타임워너 빌딩(Time Warner Building)은 부유한 어퍼웨스트사이드 지역의 콜럼버스서클에 자리 잡은 맨해튼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다. 그 건물은 지하에 있는 홀푸드마켓에서 점심을 사서 길 건너 센트럴파크로 가는 수많은 뉴요커들로 항상 북적인다.


홀푸드마켓은 텍사스와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기업이다. 눈앞에 보이는 이윤보다 고객의 건강과 사회 환경을 우선시하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라이프스타일을 중시하는 소비자는 건강과 환경을 가격만큼 중요한 가치로 추구한다. 홀푸드마켓은, 건강과 환경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값이 조금 비싸더라도 더 만족스럽고 가치 있는 물건에 돈을 쓰고 싶어 하는 소비자가 만족할 만한 제품을 판매한다.


웰빙과 친환경은 홀푸드마켓의 성공을 제일 잘 설명할 수 있는 소비 트렌드이다. 웰빙에는 빠르게 바뀐 삶의 방식이 반영되어 있다.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웰빙 트렌드를 식품 분야에 적용한 상품이 자연식품이다. 자연식품은 단순히 건강한 식품만을 뜻하지 않는다. 소비자로 하여금 환경보호에 동참한다는 자부심을 심어주는 상품이기도 하다. 웰빙의 가치를 인식하고 체험하고자 하는 욕구, 좀 더 비싼 가격을 지급할 경제적 능력이 있다는 과시 욕구, 환경보호에 일조하고 싶은 도덕적 욕구 등이 미국의 자연식품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홀푸드마켓을 성장시켰다.


소비 트렌드만으로는 홀푸드마켓의 성공을 설명하기 어렵다. 1970년대부터 미국 전역에 등장한 그 많은 자연식품 판매점 중 이 회사가 선두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홀푸드마켓은 완벽한 식품, 완벽한 종업원, 완벽한 지구라는 신조답게 기본에 충실한 기업이다. 자연식품 판매 업체로서 항상 소비자의 건강을 우선시하고 자연식품 홍보에 앞장섰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유전자 조작 농산물 GMO 판매 문제에서도 홀푸드마켓은 친환경 노선을 선택했다. 2013년 3월 미국 정부가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이용한 식품 생산과 판매를 전면 허용하자 미국의 시민단체와 환경단체가 크게 반발했다. 다른 식품 판매점이 식품 회사의 압력으로 GMO 표기를 주저하는 사이, 홀푸드마켓은 2018년까지 모든 판매 상품에 자발적으로 유전자 조작 농산물 포함 여부를 표기하겠다고 발표했다.


GMO 표기에 대한 회사의 설명이 흥미롭다. 홀푸드마켓은 소비자가 특정 상품에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 포함되지 않은 것을 알면 그 상품에 대한 소비가 15퍼센트 이상 늘어난다는 연구에 근거해, 유전자 조작 농산물 포함 식품을 원하지 않는 소비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오히려 비즈니스에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홀푸드마켓이 성공한 요인은 간단하다. 진정성을 원하는 소비자의 욕구를 누구보다도 잘 충족시켰다. 소비자는 다른 가게는 몰라도 홀푸드마켓만은 정당한 방법으로 생산한 건강에 좋은 식품을 판매할 것이라고 믿는다. 회사가 상품의 진정성을 부각하는 방법도 이채롭다.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도 기업 이미지 제고에 한몫하지만, 나는 홀푸드마겟 특유의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매장의 온도, 쾌적함, 세련된 디자인, 감동적인 서비스를 통해 소비자가 이 회사 제품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직 홀푸드마켓에 대한 궁금증이 다 풀린 것은 아니다. 어떻게 자연식품, 유기농 식품,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판매하는 홀푸드마켓이 기름진 바비큐와 텍스멕스(Tex-Mex, 텍사스 사람들의 입맛에 맞춘 멕시코 요리)를 즐기는 텍사스에서 싹을 틔우고 성공할 수 있었을까?





오스틴을 별나게 유지하자(Keep Austin Weird)


홀푸드마켓이 첫 가게를 연 사우스오스틴 지역이 이 질문의 열쇠를 쥐고 있다. 홀푸드마켓은 1980년 히피족 2명이 사우스오스틴, 정확히는 사우스러마(South Lamar) 거리에 세운 1호점에서 시작했다. 사우스오스틴은 오스틴의 대표적인 히피 지역이다.


홀푸드마켓이 히피 지역에서 처음 개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히피 이전에도 미국에는 자연식품 운동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은 계기는 1960년대 히피 문화의 시작이었다. 히피 문화는 1980년대 생태주의 운동과 최근의 로하스 운동(LOHAS: Lifestyles Of Health And Sustainability)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히피족은 기존의 권위와 주류 문화를 거부하고 대안적 삶을 사는 사람이다. 친환경, 자연과 가까운 삶을 추구하는 히피족이 대기업이 만들어낸 상업적 인공 식품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히피족이 시작한 자연식품 운동은 1980년대에 나타난 소위 여피(Yuppie)로 불리는 전문직 직장인이 외모와 건강미를 중시하기 시작하면서 주류 문화로 흡수된다. 홀푸드마켓은 이러한 시장 변화를 적극 활용하여, 일부 히피족과 기호가만 찾던 자연식품 가게에서 미국 상류층 소비자의 문화 아이콘으로 발전했다.


오스틴은 콜로라도 강 북쪽의 주의회 의사당에서 시작하여 이를 중심으로 확장해 왔다. 의사당에서 남쪽으로 뻗은 대로가 콩그레스 거리다. 이 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콜로라도 강을 건너고, 그 강 건너에는 오스틴 중심부와 사뭇 다른 분위기의 사우스오스틴이 있다. 사우스오스틴 거리 양쪽에는 미국 도시 변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층 상점이 연이어 들어서 있다. 건물 사이사이에는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지 모를 공터도 자주 보인다. 건물 대부분은 비록 허름하지만, 온갖 색깔과 꽃 등의 무늬로 장식되어 있어 단조롭지 않다. 히피처럼 건물도 히피 옷을 입고 있다. 기념품 가게, 부츠 가게, 채식 음식점, 식료품점, 타코바, 댄스홀, 술집 등 업종도 다양하다. 히피 지역답게 곳곳에 히피 복장을 한 음악가가 거리에서 음악을 연주한다. 홀푸드마켓 1호점이 있었던 사우스러마 거리는 이 사우스콩그레스 옆에 있는 거리다.


오스틴의 히피 지역은 사우스오스틴 지역만이 아니다. 텍사스 오스틴 대학 주변, 질커 공원, 이스트 6번가 등 오스틴 여러 곳에서 히피 지역을 찾을 수 있다. 오스틴에 히피 지역이 많은 이유는 역사와 관련이 깊다. 오스틴은 주 정부와 대학이 들어서면서 성장한 도시다. 그래서 오스틴에는 다른 지역 출신과 젊은 사람이 많다. 새로운 사람, 젊은 사람이 많다는 것은 다른 소도시와 달리 일부 귀족이나 가족이 오스틴을 지배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문화적으로도 오스틴은 항상 진보적이고 격식 없는 곳이었다. 개방된 문화가 꽃핀 지역에 히피족 등 대안 문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모이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히피 문화는 세월이 지나면서 오스틴을 대표하는 문화가 되었다. 1960년대의 과격한 히피 문화도 독특한, 그리고 트렌디한 생활 문화로 진화함으로써 히피 문화에 대한 일반 시민의 거부감도 상대적으로 줄었다. 오히려 히피 지역에서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며 활동하는 예술가와 음악가가 오스틴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이제 오스틴 사람도 오스틴의 색다른 문화를 자랑스러워한다. 오스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슬로건은 “Keeping Austin Weird”로, 직역하면 오스틴을 별나게 유지하자는 뜻이다.


오스틴에서 히피 운동이 활발했다는 것은 오스틴이 그만큼 자유롭고 개성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2013년 오스틴을 ‘비즈니스하기에 가장 좋은 도시’ 14위로 선정한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Forbes)는 “1960년대 정신이 살아 있고 혁신과 창의성을 강조하며 자유분방한 정신을 장려하는” 도시로 소개했다.


오스틴은 다른 텍사스 도시와 달리 신도시로 출발했고 지금도 새로운 산업과 사람을 모으는 신도시로 남아 있다. 대학생, 이민자, 전문직, 기술자 등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신도시의 문화는 구조적으로 개방적이고 자유롭다. 오스틴도 외부에서 온 이주자에게 개방적이어서 이민자가 쉽게 적응하고 정착할 수 있다.



텍사스의 포퓰리즘을 대변하는 윌리 넬슨의 컨트리 음악


오스틴은 텍사스 도시다. 텍사스의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점이 분명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텍사스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날 순 없다. 따라서 오스틴을 이해하려면 먼저 텍사스부터 이해해야 한다. 텍사스는 주州 내셔널리즘이 강하다. 외부인이 텍사스 사람을 싫어한다면 그 이유는 텍사스 사람의 자부심과 독립심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텍사스는 19세기 초반까지 멕시코에 속했던 지역이다. 1836년 미국에서 이주해 온 텍사스 주민은 멕시코 정부와 독립전쟁을 치르면서까지 독립 국가를 만들었다. 그 텍사스 공화국의 수도가 오스틴이었다. 그리고 10년 후 텍사스는 미합중국으로 편입하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텍사스 사람이 재독립을 주장할 만큼 텍사스의 독립심은 유별나다.


텍사스는 전통적으로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온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텍사스 영웅 중 한 명인 데이비드 크로켓(David Crockett, 미국의 전설적인 개척자이자 정치가)도 고향인 테네시를 버리고 텍사스로 이주했다. 이렇게 초기 텍사스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 중 일부는 범죄자들도 있었다. 많은 사람이 텍사스를 범죄자와 도망자가 전횡하는 무법천지라고 생각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텍사스가 중요하게 여기는 또 하나의 전통은 포퓰리즘(Populism, 대중주의)이다. 텍사스 사람에게 마음의 고향은 ‘가족 농장 Family Farm’이다. 그래서인지 텍사스에서는 농민과 사회적 약자를 지지하는 포퓰리즘이 강하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 전역에서 철도 회사 등 대기업의 횡포를 규탄하며 대기업 개혁을 요구하는 농민운동이 일어났는데 텍사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농민들은 자신을 스스로 포퓰리스트(Populist)라고 부르면서 정당까지 만들어 기존 정당을 위협했다. 포퓰리스트는 가족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이념적으로 기존 권력 체계와 기득권 세력에 부정적이다. 히피족이 자연생활을 추구해서 상업적 식품을 거부한다면, 포퓰리스트는 가족 농민의 생존을 위해 식품 기업과 상업적 농장에 저항한다.


오스틴이 자랑하는 음악 산업도 독립심이 강한 텍사스 전통의 영향을 받아 다른 지역과는 독립된 스타일로 발전해 왔다. 오스틴은 미국에서 몇 안 되는 음악 중심지로 컨트리 음악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사람들은 세계 최대의 음악 축제인 SXSW를 개최하고 수많은 라이브 음악을 공연하는 바와 식당을 가진 오스틴을 ‘라이브 음악의 수도’라고 부른다.


오스틴과 텍사스 정신을 극명하게 대변하는 음악가는 윌리 넬슨(William Hugh Nelson)이다. 1974년 미국 공영방송 PBS가 매주 오스틴 음악을 소개하는 '오스틴 시티 리미츠(Austin City Limits)'를 방송하면서 오스틴 음악이 전국에 알려졌다. 오스틴 시티 리미츠는 오랫동안 텍사스 대학 캠퍼스에서 녹화되었으나 지금의 녹화장은 시내 중심에 새로 건설된 무디스 극장(Moody’s Theater)이다. 오스틴 시티 리미츠의 단골 가수가 넬슨이다. 극장 앞에는 2012년에 세워진 넬슨의 동상이 있다. 아직 살아 있는 인물임에도 오스틴 곳곳에서 그를 기념하고 있다.


넬슨은 텍사스의 작은 도시 애보트(Abbott)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교회 음악을 통해 음악을 시작했고 평생 정직, 가족애, 소박함 등 농부의 가치를 노래하고 실천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는 이미 텍사스 지역에 많은 팬을 가진 성공한 음악가였다. 텍사스 사람이 넬슨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너무나 텍사스답기 때문이다. 컨트리 음악의 중심지인 내슈빌을 과감히 버리고 오스틴에서 새로운 음악을 만든 넬슨을 존경한다. 넬슨은 전형적인 포퓰리스트다. 지금도 그는 가족 농장이나 농민을 보호하는 일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나선다. 그는 음악적 친구들과 함께 가족 농민을 위한 ‘농장 후원 콘서트(Farm Aids Concert)’라는 자선공연을 25년째 계속해 오고 있다.



Tomek Baginski and Amer Mughawish on Unsplash



인간의 노력으로 일군 자연의 아름다움


오스틴은 미국에서 아주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힌다. 다양하고 개방적인 문화만큼 아름다운 자연과 레저 환경도 오스틴이 살기 좋은 도시의 하나로 꼽히는 이유이다. 텍사스를 떠올리면 으레 사막을 연상하는 사람은 오스틴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이란 말이 어색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오스틴은 정말로 숲과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오스틴 도심에 있는 콜로라도 강을 가봐도 금방 알 수 있다. 도심을 남북으로 나누는 콜로라도 강 양쪽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조깅하는 사람, 가족과 레저를 즐기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콜로라도 강 남서부에는 오스틴 시민이 자랑하는 아름다운 질커 공원이 있다. 질커 공원 안에 있는 자연 풀장인 바턴 스프링스 풀(Barton Springs Pool)은 오스틴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 명소다. 항상 섭씨 19.4도를 유지하는 약 1200제곱미터의 큰 풀장은 자연이 오스틴 시민에게 준 선물이다.


오스틴은 또한 호수의 도시다. 도심과 제일 가까운 호수는 오스틴 호수다. 부촌은 모두 오스틴 호수 주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스틴 호수 동쪽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마운트 보넬 Mount Bonnell에 오르면 오스틴 호수와 주변 지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오스틴 사람들이 무척이나 아끼는 장소다. 수많은 오스틴 젊은이가 마운트 보넬에서 사랑하는 이에게 청혼한다.


마운트 보넬에서 내려다본 오스틴 호수는 아름답다. 동시에 오스틴이 가진 엄청난 부를 보여준다. 오스틴 호수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저택이 아기자기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진다. 여기서는 오스틴 도심에서 느껴지는 텍사스 도시 특유의 공허함이나 허술함을 느낄 수 없다. 깨끗한 호수와 푸른 산이 어우러진 오스틴 호수에 서면 마치 유럽 도시의 호수에 있는 것 같다. 오스틴 호수는 댐을 통해 텍사스 최대의 담수호인 트래비스 호수로 연결된다. 트래비스 호수 주변도 오스틴 호수와 마찬가지로 오스틴과 텍사스 부자가 별장이나 저택을 짓고 사는 지역이다.


오스틴 호수와 트래비스 호수 모두 오스틴 도심 서쪽에 있다. 오스틴 서부 지역은 텍사스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힐 컨트리(Hill Country)가 시작하는 곳이다. 텍사스는 다양한 지형을 갖고 있는데, 중부의 힐 컨트리에서만 나무가 빽빽한 아름다운 언덕과 산을 볼 수 있다. 힐 컨트리는 19세기 유럽, 특히 독일에서 온 이민자가 많이 정착한 곳이다. 그 영향으로 오스틴과 주변 도시에는 프레드릭스버그(Frederickburg)와 같은 독일식 지명이 유난히 많다. 오스틴 시내의 유명한 독일 음식점인 슐츠 가든(Scholtz Garten)은 독일 이민자 오구스트 슐츠가 1866년에 세운 맥주 가든이다. 그러나 힐 컨트리의 역사는 겉모습과 달리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곳에 정착한 농민들은 오랫동안 가뭄, 홍수, 가난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오스틴의 척박한 자연은 주민의 각고의 노력과 열정으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거듭났다.



가난한 생활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자연환경은 오스틴을 사람과 기업이 모이는 도시로 만들었지만, 오스틴에 처음 방문한 사람은 아름다운 호수가 사실은 인공 호수이고 도도하게 흐르는 강도 인위적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처음 힐 컨트리에 정착한 유럽인들은 그곳에서 아주 비옥한 농토를 기대했다. 힐 컨트리에는 산, 강, 그리고 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농부들은 힐 컨트리의 자연이 가혹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무는 있으나 땅 밑은 암석층이었다. 농작물 경작에 중요한 표토층은 2.5센티미터에 불과했다. 오늘날 오스틴의 척박한 토양을 쉽게 확인하려면 오스틴 주변의 고속도로에 가면 된다. 산을 깎아 만든 고속도로의 절단면은 절벽이 되어 있고, 나무는 절벽 위에 남아 있으나 그 밑에는 흙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스틴 산은 말 그대로 돌산이다. 정착 초기에 농부들은 나무를 제거한 언덕에 간신히 농작물을 심어놓아도, 뿌리가 깊이 박히지 않아 퍼붓는 소나기가 농작물을 모두 휩쓸어가는 낭패를 겪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힐 컨트리의 강은 항상 범람했다. 수리 시설이 있음에도 지금 역시 콜로라도 강 부근은 홍수가 빈번하다. 홀푸드마켓 1호 점도 1981년에 일어난 홍수 탓에 대다수 재고품을 잃은 경험이 있다.


이런 이유로 힐 컨트리의 농부는 가난했다. 미국의 36대 대통령 린든 존슨(Lyndon Johnson)도 대다수 텍사스 남자들의 처지처럼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오스틴에서 서쪽으로 약 72킬로미터 떨어진 존슨시티(Johnson City)다. 힐 컨트리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존슨시티도 가난한 농촌 마을이었다.


혹독한 가난은 존슨과 힐 컨트리 사람의 인생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난이 텍사스 포퓰리즘을 만들었고 텍사스 민주당을 만들었다. 텍사스 민주당의 지도자가 된 존슨은 평생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위한 정치를 했다. 1937년 처음으로 연방하원으로 당선된 존슨은 1949년까지는 하원의원으로, 그 후 1961년까지는 부통령이 되어 연방상원의원으로 텍사스 주민을 위해 봉사했다.


존슨의 발자취는 오스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중 대표적인 기념물이 텍사스 오스틴 대학 동쪽 끝에 자리한 존슨 대통령 기념관과 도서관이다.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을 조기에 종료시키지 못해 불명예스럽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그를 다시 평가하고 있다. 존슨이 화려한 수사나 권위주의가 아닌 사람에 대한 진정한 애정으로 우리 시대가 필요한 대화, 협력, 통합의 리더십을 보인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오스틴이 열악한 자연환경을 길들이기 위한 사업을 시작한 때는 19세기 말이었다. 1893년 도심에 오스틴 댐을 건설해 현재의 오스틴 호수를 만들었다. 1940년대에 오스틴 시장이었던 탐 밀러 Tom Miller는 당시 오스틴 출신 하원의원이었던 존슨 전 대통령과 함께 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아 오스틴 댐을 보수하고, 강 상류에 맨스필드 댐을 새로 건설하여 트래비스 호수를 만들었다. 이 같은 대규모 토목 공사로 텍사스 정치인들은 대공황으로 발생한 실업자를 구제하고 힐 컨트리 농민을 가뭄과 홍수에서 구했다.


이렇듯 현재 오스틴의 부자들이 사는 오스틴 호와 트래비스 호 지역, 그리고 이들 호수가 만드는 생활환경의 기원은 1940년대 미국의 민주당이 가난한 농부를 위해 만든 댐에서 시작됐다. 아름다운 오스틴에서 볼 수 있는 자연의 백미는 역설적으로 인공의 산물이었다.



인공적 혁신 생태계


도시를 위한 인간의 노력은 호수 건설 이후에도 계속됐다. 오스틴은 미국에서 중요한 첨단산업 중심지 중 하나가 됐다. 지금도 많은 실리콘밸리 기업이 캘리포니아의 세금과 규제를 피해 오스틴으로 이전하고 있다. 이처럼 오스틴에는 벤처 기업이 모이는 한편 IBM, 모토로라, 삼성 등 다수의 세계적인 첨단기술 기업들도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다. 델(DELL) 컴퓨터 등 오스틴에 본사를 둔 대기업도 상당하다. 오스틴이 첨단산업의 허브로 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스틴은 미국의 대표적인 주립대학, 독특한 문화, 그리고 다른 도시가 부러워하는 주거환경을 가진 도시다. 첨단기술 산업이 발전하기 전에도 오스틴은 항상 살기 좋은 도시였다.


모름지기 창조 도시라면 개방적인 문화와 더불어 인재를 유치하고 붙들어 놓을 주거 환경을 필수적으로 가져야 한다. 오스틴은 이 2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도시다. 10만 명에 이르는 대학생은 항상 오스틴을 젊고 개방적인 도시로 유지한다. 인재들은 인공 호수가 자아내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오스틴에 남기를 원한다. 오스틴은 인재를 키우는 족족 다른 도시로 빼앗기는 평범한 도시와 다르다. 그러나 창조 도시도 결국 사람이 만든다. 한 도시가 첨단산업의 허브가 되기 위해서는 인적, 문화적 조건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객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활용하여 실제로 첨단기술 기업을 개발하고 유치하며 지원할 사람, 그리고 이들을 이끄는 리더가 필요하다.


오스틴의 성공을 평가할 때, 적극 투자를 유치하고 친기업적 환경을 조성한 오스틴 시 정부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 오스틴은 미국에서 기업을 운영하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텍사스 주가 소득세를 부가하지 않아 기업가들은 소득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반면 캘리포니아의 주 소득세는 최고 12.3퍼센트에 달한다. 기업가들이 상대적으로 규제가 적고 주택 가격이 싸며 고급 인력이 풍부한 오스틴의 비즈니스 환경을 캘리포니아보다 선호할 이유는 명확하다.


오스틴 첨단산업의 역사를 보면 민간 지도자들도 시 정부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오랫동안 텍사스 대학에서 경영대학장으로 일한 조지 코즈메스키(George Kozmetsky)이다. 코즈메스키는 1960년대에 오스틴에 오기 전, 이미 LA에서 세계적인 테크놀로지 회사인 텔레다인(Teledyne)을 공동 창업한 유명한 창업가이다. 그는 텍사스 대학 경영대학장으로 20년 가까이 재임하면서 오스틴 첨단산업의 기본 골격을 설계해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코즈메스키는 오스틴에서 트래코어(Tracore) 등의 기업을 직접 설립해 수많은 벤처 기업의 창업을 지원했다. 오스틴에서 창업하여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가 된 델 컴퓨터도 그의 직접 투자와 지원으로 시작했다.


오스틴에 첨단산업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전문 연구기관 IC2(Innovation, Creativity, and Capital)가 설립된 것도 코즈메스키의 공이다. IC2는 민간 기업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1980년대 당시 미국 산업계에 생소했던 엠씨씨(MCC), 세마테크(Sematech) 등 정부·민간 연구 컨소시엄을 조직해 미국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세계적인 첨단산업 중심지로 성장한 오스틴을 배우기 위해 많은 도시 지도자와 도시 개발 전문가가 찾아온다. 나는 그들이 오스틴의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히피 문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 독립정신, 평등주의, 엉뚱함을 장려하는 다양성 등 이 도시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하길 바란다.


오스틴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도시의 운명과 미래는 궁극적으로 도시 주민과 지도자에게 달렸다는 사실이다. 오스틴 성장 역사에서 외부 지원, 특히 중앙정부의 지원은 부수적이었다. 오스틴은 코즈메스키와 같은 지역의 민간 지도자가 자신이 사는 도시의 미래를 성공적으로 일구어낸 사례다. 오스틴의 혁신 생태계는 인공이 새로운 자연환경을 만든 또 하나의 신비로운 체험이다.



출처: 작은 도시 큰 기업, 2014



매거진의 이전글 포틀랜드 라이프스타일이 나이키를 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