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포틀랜드는 소상공인 중심의 창조도시다. 내가 속한 커뮤니티의 언어로 표현하면 로컬 크리에이터의 도시다. 포틀랜드 로컬 크리에이터 산업은 커피, 수제맥주, 로컬 브랜드, 메이커, 자전거, 아웃도어 등 다양한 업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힙스터 산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로컬 크리에이터 산업이 포틀랜드에서 번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람일 것이다. 포틀랜드는 1990년대 이후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멋지게’ 사는 힙스터와 플레이어들이 살고 싶어하는 도시로 부상했다. 세계의 힙스터들이 부러워하는 포틀랜드의 도시문화는 이처럼 외부에서 유입된 플레이어들이 ‘모여 놀면서’ 만든 문화다. 정부가 장기 계획을 수립해 체계적으로 육성한 산업이 아니다.
정부가 포틀랜드의 독립산업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포틀랜드는 1970년대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한 대표적인 압축도시 모델이다. 성장 한계 지역을 설정해 도시의 팽창을 제한하고, 도시 고속도로와 대형 마트의 도심 진입을 저지하며, 엄격한 환경 규제로 온실가스 배출을 국제사회 기준으로 통제했다. 포틀랜드 지역을 50여개 상권으로 나누어 도시재생과 상권 공동체 사업을 지원하는 ‘동네 경제’ 정책도 독립기업의 발전에 기여했다.
한국의 포틀랜드가 되고자 하는 도시가 기억해야 하는 키워드는 산업적으로는 커피, 수제맥주, 로컬 브랜드, 메이커, 자전거, 아웃도어, 도시 정책으로는 환경과 동네 경제 정책이다. 현재로서 한국에서 한국의 포틀랜드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도시를 꼽는다면 도시 산업의 구성과 도시 정책의 우선순위를 점검해야 하며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필자가 가장 유망한 후보로 꼽는 도시는 강릉이다.
강릉을 선택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커피다. 강릉은 한국 도시 중에서 유일하게 커피를 지역산업으로 발전시킨 곳이다. 강릉의 커피산업은 해변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해변 커피거리의 원조는 강릉 안목해변이다. 안목해변은 전국 모든 커피 프랜차이즈가 총집결한 커피거리로 변신한지 오래다. '도도한' 스타벅스도 2013년 안목해변에 매장을 열었다. 스타벅스가 왜 유동인구가 적고 상업 중심지도 아닌 안목해변에 매장을 열었을까? 물론 매장의 경제성도 고려했겠지만, 새로운 커피중심지로 떠오른 안목해변의 위상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안목해변 커피거리의 역사는 소박하다. 1990년대 해변을 찾는 관광객을 위해 한 모퉁이에 커피 자판기를 설치한 것이 그 시작이다. 하지만 그렇게 안목해변에서 시작된 커피문화는 어느새 경포대해변, 사천해변, 양양 죽도해변 등 다른 해변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왜 강릉일까? 강릉의 커피 문화를 체험하면서 머리 속에 맴돌던 질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업가 정신에 주목한다. 문화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니 아무래도 선구자의 공이 클 것이다. 강릉의 커피산업을 개척한 사람은 2000년대 초반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을 시작한 보헤미안의 박이추 대표와 테라로사의 김용덕 사장이다.
그 외에 강릉의 문화적 토양도 간과할 수 없다. 강릉은 항상 여타 동해안 지역과 다른 문화도시였다. 선교장, 오죽헌 등 경포대 호수 주변에 위치한 전통 문화 유산을 방문하면 양반도시 강릉의 세련된 외관과 풍요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음식도 양념이 강하지 않고 정갈하다.
강릉은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커피도시로 발전했다. 강릉시 전역에 300개가 넘는 커피전문점이 운영되고 있고 이들 중 상당수가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은 커피전문점이다. 또한, 강릉의 커피전문점은 단순한 커피소매점이 아니다. 많은 강릉 커피전문점들이 전국 카페와 음식점에 커피를 공급하는 로스팅 비즈니스를 본업으로 하고 있다. 이 중 전국적인 체인으로 성장한 기업이 테라로사다.
강릉은 또한 연 5,000명의 바리스타를 배출하는 커피산업 인력의 양성지이기도 하다. 보헤미안과 테라로사 등 강릉 커피산업을 개척한 가게들은 공통적으로 커피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고, 강릉 지역의 대학들도 관련 과정을 개설하며 발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성장을 등에 업고 강릉시는 커피산업 지원을 위해 매년 10월 커피축제를 개최한다. 작은 규모로 시작한 이 행사는 이제 연 20만 명이 찾는 전국 최대 규모 커피축제로 성장했다. 축제에 참여하는 관광객은 국내 최고 수준의 커피를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요 커피 기업이 운영하는 커피박물관에서 산업의 역사를 배우고 커피나무 재배와 커피 생산 과정을 체험할 수 있어 만족도가 매우 높다.
강릉의 커피산업은 처음에는 관광객을 위해 시작됐지만 지금은 강릉 사람들을 위한 지역문화로 자리잡았다. 커피전문점 에디오피아 주인에 따르면, 가게를 방문하는 관광객과 지역 주민 비율이 50대 50으로 거의 같다고 한다. 이 정도로 커피를 즐기다 보니 자연히 수준이 높아져서, 요즘 강릉 주민들은 다른 도시 가면 맛없어서 커피를 못 마시겠다고 불평할 정도라고 한다.
포틀랜드를 대표하는 소상공인 산업의 하나가 수제맥주와 양조다. 포틀랜드의 수제맥주 기업은 60여개에 달해, 미국에서 수제맥주 공장이 가장 많은 도시로 알려졌다. 도시 양조 또한 수제맥주만큼 발달했다. 포틀랜드 거리를 걸으면 위스키, 럼, 진 등 다양한 술을 제조하는 소규모 양조장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강릉 수제맥주 또한 평판이 높아간다. 현재 강릉에는 브루어리, 버드나무브루어리 성산, 버드나무브루어리 등 3곳의 수제맥주 공장이 운영한다. 강원도 지역의 수제맥주 업체는 16개로, 경기(35개), 서울(17개) 다음으로 많다. 많은 전문가가 강릉을 포함한 강원도가 자연, 물, 관광자원을 바탕으로 지역의 로컬 맥주 산업을 선도할 것으로 전망한다.
강릉에는 지역에서 출발해 지역의 대표 브랜드로 성장한 기업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식가공업에서는 초당마을 협동조합에서 생산해 전국으로 유통하는 강릉초당두부가 대표적이다. 밀레니얼 취향의 로컬 브랜드도 다양하다. 커피 분야의 테라로사, 카페 보헤미안, 커피 커퍼, 디저트 분야의 순두부 젤라또가 강릉에서 다수의 매장을 운영하는 지역의 대표 로컬 브랜드다. 로컬 브랜드 개념을 짬뽕, 짬뽕순두부, 꼬막, 포차 등 전통 식음료 분야로 확대하면 강릉 로컬 브랜드의 수는 크게 늘어난다.
강릉의 디자인 브랜드도 둥지를 트고 있다. 강릉 문화를 감각적으로 디자인한 기념품을 판매하는 사천해변의 디자인샵 바이라다가 대표적인 디자인 기업이다. 파도살롱을 운영하는 더웨이브컴퍼니도 강릉 라이프스타일을 기반으로 한 밀레니얼 감성의 패션 라인 닐다의 출시를 앞두고 있다.
포틀랜드 경쟁에서 강릉이 유리한 또 하나의 이유는 동네다. 강릉은 하나의 중심이 압도하지 않고 수평적으로 이어진 여러 동네가 공존하는 도시다. 교동, 명주동, 홍제동, 인담동, 포남동 등 각각 특색을 유지하는 동네가 강릉을 차분하고 매력적으로 만든다.
동네 경쟁력을 엿볼 수 있는 분야가 맛집이다. 강릉의 맛집은 한 지역에 밀집되어 있지 않고 도시 전역에 흩어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각 동네에 그 동네를 대표하는 맛집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포남동의 빵다방, 초당동의 툇마루와 순두부젤라또, 명주동의 오월과 봉봉방앗간, 홍제동의 버드나무브루어리, 강문해변의 카페폴앤메리가 동네의 앵커스토어다. 교동의 게스트하우스 위크엔더스, 홍제동의 캘리그래피숍 글씨당, 명주동의 코워킹스페이스 파도살롱, 포남동의 북스테이 포남포남도 콘텐츠 기반의 앵커스토어를 향해 발돋음한다.
강릉에서 살아있는 동네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원도심 명주동이다. 명주동에는 강릉도호부 관아, 칠사당, 임당동 성당 등 문화재, 개성 있는 상가, 창조인재 공간이 어우러진 골목상권이다. 매년 여름 강릉시는 명주동 중심으로 다양한 강릉 문화를 소개하는 '강릉 문화재 야행'을 운영한다. 주민들이 소셜다이닝 모두의 식탁Under Sky를 운영할 정도로 주민 문화도 강하다. 2018년 가을의 식단에는 일반 식당에서 접하기 어려운 두부전, 무생채, 곤드레밥, 가마솥 장국, 문어 간장 무침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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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은 한국의 포틀랜드, 즉 소상공인 중심의 창조도시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이 그 어느 도시보다 크다. 포틀랜드 모델에 필요한 커피산업, 동네문화, 자연환경, 문화예술, 음식문화 분야에서 강릉을 능가할 도시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강릉이 포틀랜드로 가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아직 채워야 할 것이 많다. 포틀랜드에 비해 강릉의 메이커, 아웃도어, 자전거, 환경 산업은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
하지만 미래는 다를 것이다. 강릉의 로컬 크리이에터들이 현재와 같이 지역 자원을 연결하는 창의적인 비즈니스를 창업한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필요한 산업을 다 채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지역문화의 정의다. 포틀랜드의 힙스터 산업과 독립 산업이 지역의 전통문화가 아니 듯이 강릉이 활용해야 할 지역문화가 반드시 전통문화일 필요는 없다. 강릉을 대표하는 커피문화는 외부에서 수입된 ‘인공적인’ 지역문화다. 순두부 젤라또, 순두부 스프레드의 성공이 보여주듯이 전통문화에 기반한 상품도 인공적인 재해석이 필요하다.
창의적 기업가들에 의해 지역 환경이나 전통과 큰 관련 없는 지역문화가 강릉에 자리잡았다. 인공성이 오히려 강릉 지역발전에 큰 자산이 된 것이다. 강릉의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다시 한 번 기업가 정신을 발휘한다면, 강릉의 인공적인 지역산업은 강릉 경제를 견인하는 신성장동력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