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생활권 구축 방안
많은 트렌드 리포트의 예측과 달리 ‘오프라인의 귀환’은 생각보다 빨리 올 수 있다. 백신 접종의 효과가 나오기 시작하는 2021년 하반기에는 정부와 기업이 포스트 코로나 준비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온라인에 대한 피로감도 오프라인 회귀 가능성을 높인다. 코로나 1년의 의식주 생활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을 ‘온라인에 질렸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포스트 코로나 도시가 코로나 전의 과거로 돌아간다는 말은 아니다. 다른 오프라인과 마찬가지로 도시도 코로나 시대의 경험을 기반으로 진화할 것이다. 인류에게 다행인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강요한 도시가 우리에게 새로운 도시가 아니라는 점이다. 선진국에서 지속가능성과 공동체를 위해 추진해 온 '15분 도시', 즉 보행이나 자전거로 집에서 15분 안에 일, 주거, 상업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도시다.
코로나 시대에 15분 도시와 같은 생활권 도시가 필요한 가장 큰 이유는 원거리 이동의 위험이다. 실제로 원거리 이동이 어려워지면서 일상이 변했다. 시간을 많이 보내는 공간이 오프라인, 일터, 여행지에서 온라인, 집, 동네로 변한 것이다.
비대면의 필요성과 선호는 자연스럽게 언택트를 늘렸다. 재택근무가 활성화되고 외출을 자제하면서 홈택트(집에서 보내는 시간과 가족과의 접촉)가 증가했다. 또 하나의 변화가 로컬택트다. 방역을 지역 단위에서 수행하면서 지역 정부와 주민과의 접촉이 늘어났다. 멀리 갈 수 없으니 사는 동네에서 쇼핑과 여가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졌다. 언론에서는 언택트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지만, 실생활에서는 홈택트와 로컬택트도 언택트만큼 활발해졌다. 언택트, 홈택트, 로컬택드의 동시적 부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의 일상이 집과 동네, 그리고 온라인 중심으로 바뀌었다면, 이 라이프스타일을 지원하는 도시가 필요하다. ‘로컬 기술 기반 생활권 도시’가 바로 그 도시 모델이다.
동네가 삶의 중심으로 진입한 것은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통계도 이를 입증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행한 3-4월에 유일하게 늘어난 소비 분야가 '홈 어라운드 소비'였다(조선일보 4월 24일). 집에서 500미터 이내의 카드 결제는 8.0% 증가한 반면, 집에서 멀어질수록 소비가 떨어져 3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의 카드 결제는 12.6%나 감소했다. 1차 코로나 감염이 진정된 5월 말에는 서울시 소상공인 매출이 동네 상권을 중심으로 회복됐다(중앙일보 6월 11일). 동네 상권은 전년 동기 대비 97-99% 회복한 반면, 대학가와 관광지는 부진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학이 문을 열지 못하고 여행을 가는 사람이 줄었기 때문이었다.
업종 별 매출 변화도 흥미롭다. 인터넷 쇼핑, 홈쇼핑 등 언택트 업종의 매출만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조선일보 5월 21일). 매출 증가 상위 10개 업종 중 자전거, 정육점, 주류전문점, 슈퍼마켓, 약국 등 동네 업종이 반을 차지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신뢰도 변화 조사에서도 동네의 부상이 부각됐다(시사in 6월 21일). 이웃 사람과 지방정부가 신뢰도가 높아진 기관에 포함됐는데, 이 항목들이 리스트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
동네 경제와 로컬택트가 활성화되자 동네 기반 서비스도 증가한다. 동네 주민 간 중고 직거래를 중개하는 당근마켓의 방문자 수가 급증해, 당근마켓은 이제 국내 제1의 중고품 거래 서비스로 성장했다. 다른 대기업도 동네 주민 배달, 동네 맛집 추천, 동네 상품 선물하기, 동네 시장 배송 등 다양한 동네 기반 서비스를 연이어 출시한다.
여행은 동네 중심의 삶을 감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분야다. 제주관광공사의 빅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제주를 방문하는 여행자의 다수가 제주의 한 지역에 머문다고 한다. 과거에는 제주를 순환하는 여행이 유행했으나, 최근에는 한 지역에 들어가면 그 지역에서 나오지 않고 동네와 지역 문화를 즐기는 여행자가 늘어난 것이다.
생활권 도시의 특징인 직주 일치 현상도 뚜렷하다. 코로나 위기가 시작되기 전에도 밀레니얼 세대를 중심으로 직장에서 가까운 곳에서 사는 회사원이 증가하는 추세였다. 직장과 같은 자치구에서 거주하는 서울 회사원이 이미 2018년에 절반을 넘었다(국민일보 2019년 8월 13일). 코로나 시대의 생활패턴은 그전부터 시작된 변화의 연장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다. 코로나 위기가 단기에 해결된다고 해도 지금의 생활 방식은 변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할 수 있는 이유다.
정리하면, 코로나 시대에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것과 계속 유지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 구분된다. 해외여행, 원거리 출퇴근, 대형 실내공간, 글로벌 메가시티, 세계화,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과의 결별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 반면, 전원도시, 적당한 수준의 인구와 공간의 밀도, 보행과 자전거, 지역공동체는 코로나 시대에 더욱 중요시해야 할 가치로 부상했다. 결국, 일, 주거, 놀이를 근거리에서 해결할 수 있는 생활권 도시가 코로나 시대가 요구하는 도시다.
생활권 도시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미국의 도시학자 제인 제이콥스가 1960년대 골목길 도시의 보전을 주장한 이후, 많은 도시 학자가 휴먼 스케일 도시, 사람 중심 도시, 걷고 싶은 도시의 개념으로 생활권 도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90년대 선진국의 밀레니얼 세대가 역동적인 어반 문화를 찾아 다운타운으로 이주하면서, 선진국 도시들이 도심에서 일자리, 상업활동, 주거시설을 활성화하는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했다. 특히, 인구 감소를 겪는 산업도시가 상업과 주거 시설을 도심에 집중시켜 도시 환경과 고령 인구 복지를 개선하는 생활권 도시 사업에 열중했다.
최근 글로벌 대도시도 생활권 활성화를 통해 주민 삶의 질을 높이려 한다. 도시 어느 곳에서 살아도 자전거로 1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 안에서 생활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계획을 발표한 파리가 대표적 사례다. 미국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포틀랜드도 도시를 95개 상업지역으로 나누어 동네 단위의 경제 활성화 계획을 수립한다.
한국에서도 로컬의 부상에서 생활권 지향을 감지할 수 있다. 2010년대 초반에 등장한 한국의 로컬 지향은 귀농귀촌, 제주 이민, 골목상권, 핫플레이스, 고향 지향 등 5개의 형태로 진행된다. 밀레니얼 사이에서는 '로컬전성시대'가 왔다고 할 만큼 로컬과 로컬 창업에 관심이 많다. 빅데이터도 로컬과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을 확인한다. 사람들이 로컬, 골목길, 라이프스타일 단어와 함께 연상하는 감성은 다양한, 가능하다, 좋다 등 모두 미래지향적이고 희망적인 단어다. Top 10 연관어 중 부정적인 단어는 하나도 없다.
로컬이 부상한 배경에는 삶의 질에 대한 욕구가 존재한다. 환경과 공동체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끼는 밀레니얼 세대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대안으로 지역생산과 지역소비를 선호한다. 개인주의와 공동체를 통합하기 위한 노력도 밀레니얼 세대의 특색이다. 여유 있게 일상을 즐기고 이웃과 소통하며 사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는다. 무엇보다, 정체성과 진정성을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는 로컬을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할 수 장소로 인식한다. 환경, 공동체, 정체성 등 삶의 질에 대한 욕구가 로컬 지향 현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로컬 지향은 한국이 2010년대 들어와 서구의 탈물질주의를 수용한 것을 의미한다. 서구사회는 1960년대 혼란기를 거처 1970년대에 진입하면서 물질적 성공, 경제, 성실, 조직, 신분을 강조하는 물질주의를 개성, 다양성, 삶의 질,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탈물질주의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오랫동안 소득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물질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국가로 머물렀다. 탈물질주의를 수용한 밀레니얼 세대가 2010년대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하면서 탈물질주의가 확산된 것이다.
15분 도시는 이처럼 새롭게 강요된 도시가 아니다. 삶의 질을 원하는 선진국과 밀레니얼 세대가 추구하는 도시다.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에 환경과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필요한 도시 모델이다. 그렇다면 한국 도시를 어떻게 생활권 도시로 재구성해야 할까? 도시 분산과 통합, 생활권 경제의 구축, 오프라인 상권 재편, 온라인-오프라인의 융합, 로컬 크리에이터 육성 등이 생활권 도시를 위해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과제다.
첫째, 가장 큰 과제가 도시 분산과 통합이다. 대도시는 3-50만 명 단위 생활권 도시로 분산해야 하고, 중소도시는 2-30명 규모의 생활권 도시로 통합해야 한다. 대중교통에 의존해야 하는 대도시는 코로나 시대에 적합하지 않다. 아무리 기술로 보완한다고 해도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은 '3 밀'(밀집, 밀폐, 밀접)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효과적인 방역을 어렵게 만드는 고립된 저밀도 지역도 위험하다. 작은 도시를 모아 방역과 복지 시설이 중앙에 집중된 콤팩트 도시로 통합하는 것이 소멸 위험 지역의 과제다.
둘째, 생활권 도시의 자생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주거, 교육, 상업 시설과 더불어 산업 기반의 구축을 요구한다. 다행히 재택근무, 원격의료, 온라인 교육과 쇼핑이 활성화되면서 대도시나 대도시 중심부에 살아야 할 필요성이 약해지고 있다. 국내여행, 로컬푸드, 집 가꾸기, 자전거, 아웃도어, 골목 산업 등이 생활권 도시가 활용할 수 있는 지역산업으로 부상했다.
일자리와 상업 시설이 생활권으로 분산되면 생활권 내의 주택 공급이 중요해진다. 생활권 내에 대규모 부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리모델링, 유휴 공간 활용 등 소규모 개발 사업을 통해 주택을 공급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다. 기존 주택의 리모델링뿐만 아니라 서울 일부 지역에서 시작된 도시형 상가주택(황두진 건축사무소의 무지개떡 건축), 공동체 주택(에이라운드 건축의 써드플레이스 홍은), 면목동 마을형 공동주택 등이 새로운 공급 모델이 될 수 있다. 생활권을 행정동으로 정의하고 각 생활권 당 100개 가구만 공급해도, 서울시 전체로는 42,500개 주택을 공급할 수 있다(425 행정동 x 100 가구). 서울시가 주민의 삶의 질을 중시한다면, 생활권과 연결된 '양질'의 주택을 생활권 단위로 공급하는 것이 순리다.
셋째, 오프라인 상권의 재편도 시급한 과제다. 생활권 경제가 중산층에 충분한 고용을 제공하려면, 소상공인 활동할 수 있는 상권을 공급해야 한다. 코로나 시대에 필요한 상권은 자연 친화적이고 주거지역과 가까운 상권이다. 상권의 개별 공간도 자연환기 중심의 안전한 공간이 돼야 한다. 테라스, 옥상, 야외 좌석을 활성화하고, 실내 매장도 일정 수준의 환기 기준을 만족하는 공간으로 개조해야 한다. 생활권 도시의 건축환경을 거리문화 중심으로 디자인하면 생활권 도시는 소상공인 산업 활성화에 필요한 대규모 유동인구를 창출하는 소상공인 도시로 자리 잡을 것이다.
넷째, 친환경, 보행자, 소상공인, 지역혁신 기술 등 생활권 도시에 적합한 스마트 도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생활권 도시의 경쟁력이 자연환경, 보행 이동, 소상공인 산업, 주민의 지역혁신 참여이기 때문이다. 도시 운영의 자동화, 디지털 시장과 상점 등의 스마트 도시 기술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다섯째, 생활권 도시에 필요한 문화와 산업을 개척할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 자생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지역성과 결합된 자신만의 콘텐츠로 메이커, 공방, 로컬 숍, 수제 맥주, 스페셜티 커피 등 다양한 로컬 브랜드와 산업을 창출하는 로컬 크리에이터의 역할이 중요하다.
동네 중심의 생활권 도시는 효율성과 편리성 중심의 하이테크와 인간 감성 중심의 하이터치가 이상적으로 결합된 도시다.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동시에 삶의 질을 높이는 생활권 도시를 광범위하게 구축한 지역과 국가가 코로나 시대를 주도할 것이다.
환경과 조경, 2020년 10월호 기고문을 기초로 작성했습니다.
1차 수정 2020년 10월 31일
2차 수정 2021년 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