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지난 60년 동안 한국의 중심 도시로서 국가 경제를 견인해왔다. 수많은 대기업 본사가 서울에 집중된 것만으로도 서울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드러난다. 가까운 미래에도 이러한 분위기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이 국가 중심 도시로서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보다 선명한 미래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세계 다른 대도시와의 경쟁이 심화하고 서울에 본사를 둔 대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은 약화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글로벌 기업 육성이 당면과제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관건은 글로벌 기업을 키우는 방법이다. 산업 정책 방향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지만, 전문가 대부분은 서울의 미래가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우선 가까운 시일 내에 서울은 특별한 대응 없이도 전국의 자본과 인재가 몰리는 현상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 중심 도시 간의 경쟁이 심화하고 도시 경쟁력의 원천 자체가 물리적 조건에서 인재 중심으로 전환됨에 따라, 이제 서울도 산업사회에서 독점적으로 누렸던 우월적 지위에 안주할 수 없게 됐다.
따라서 기업 환경, 교육시설, 교통 및 통신 인프라, 생활 및 문화 환경 등 도시 경쟁력을 강화함으로써, 글로벌 인재와 차세대 성장 산업을 유치하는 등 세계 경제 중심 도시가 추진하는 보편적인 발전 전략을 따르는 동시에, 그들과 차별되는 전략으로 경쟁 도시를 추월하는 양동 전략을 펼쳐야 한다.
서울이 차별적 전략을 추진하는 데 있어 가장 주목해야 할 분야는 지역 산업 정책이다. 이를 위해서는 도시산업 정책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필자의 저서 <작은 도시 큰 기업>은 글로벌 대기업을 키운 세계의 작은 도시들이 선택한 지역 산업 전략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소개하고 있다. 서울 역시 통합된 대도시로서 도시 전체의 자원과 환경에 적합한 산업을 육성하는 전통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다수의 ‘작은 도시’로 구성된 다중심(Policentric) 도시로 거듭나 ‘작은 도시’의 특색에 적합한 기업을 창업하고 성장을 지원하는 미래 패러다임을 수용해야 한다.
서울이 ‘작은 도시 패러다임’을 선택한다고 해서 대도시가 주는 장점을 스스로 포기할 필요는 없다. 기존 기업과 산업이 경쟁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도록 돕는 지원은 필수 과제다. 또한, 해외 글로벌 도시와 경쟁하기 위해 차세대 제조업, IT-바이오 융합, 환경산업 등 전 세계 도시가 경쟁적으로 유치하고 투자하는 미래산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투자하고 거주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
이와 동시에 서울은 개방성, 차별성, 유연성, 세계화 등 ‘강소도시’의 장점 역시 활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서울 경제를 일정 수의 단위 지역 경제로 구성된 네트워크 경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단위 지역 경제는 창조경제 시대에 특히 중요하다. 창업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창업가와 투자자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좁혀야 하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투자자가 자동차로 30분 이상 떨어져 있는 기업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초기 투자의 속성상 투자자는 자금만 대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경영, 마케팅 등 경영 전반을 지원하는 실제적인 공동 창업자이기 때문에, 창업가와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자주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은 도시 서울’은 각 단위 지역이 가진 고유한 비교우위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업과 산업을 유치하고 개발하는 경제 시스템 도시를 일컫는다. 지역경제의 자생력과 관련해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개념은 산업생태계다. 지역 산업생태계란 기업, 정부, 연구소, 대학 등 다양한 경제 주체가 유기적인 협업을 통해 기존 산업을 혁신하고 새로운 기업과 산업을 창조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서울은 현재 이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충무로 영화산업, 동대문 패션산업, 테헤란로 벤처산업, 금천 디지털단지 등 서울에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산업 클러스터가 존재하지만, 이들 지역이 자생적인 혁신 생태계로 기능하면서 기존 산업을 혁신하고 새로운 산업과 기업을 창조한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서울이 각 지역의 문화적 특색을 살린 기업을 유치하고 개발하기를 원한다면 지역 고유의 특색을 포착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다행히 최근 들어 서울의 단위 지역들이 골목길 상권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적 특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 홍대에서 시작된 골목길 상권이 2000년대 중반 급속한 성장세를 보이며 현재는 연남동, 연희동, 부암동, 성수동 등 서울에만 20~30개 지역으로 확산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국의 골목길 상권은 말 그대로 상권에 머무르고 있다. 골목길 문화를 대표하는 홍대도 생활과 산업의 중심으로는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골목길 경제의 숙제는 창조화다.
이와 더불어 서울은 각 단위 지역에 소재한 대학을 중심으로 새로운 단위 지역 경제를 건설해야 한다. 지역경제가 위기에 빠진 상황이라 대학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하지만 서울의 대학은 지역경제와 독립적으로 발전해왔다. 지금까지 대학은 서울의 대학이자 대한민국의 대학으로 인식될 뿐 특정 지역을 대표하지는 못했다. 황용헌 창조경제타운 단장은 대학의 잠재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으로 서울의 동북권을 든다. 20여 개 대학이 몰려 있는 이 지역은 대학을 중심으로 새로운 스타트업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는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단위 지역 경제를 육성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또 한 가지 포인트는 지역 문화다. 지식과 창조경제 시대에는 전통적인 입지 조건보다 창조 인재를 유인하는 도시문화가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이미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도시문화는 창조경제의 기반이 된다. 현재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많은 도시가 내재된 가치와 문화를 키움으로써 창조도시로 발전했다.
서울은 이미 역동적인 문화를 가진 다양한 단위 지역으로 구성돼 있다. 그 잠재성이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을 뿐이다. 단위 지역의 문화와 비교우위를 중심으로 산업생태계, 골목길 경제, 그리고 대학 경제를 건설하고 이들 간의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인프라를 구축한다면 서울은 글로벌 기업이 자라나는 든든한 토양이 될 것이다.
출처: 라이프스타일 도시, 위클리비즈,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