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이 발전하면 자연스럽게 증가할 업종이 로컬 브랜드 편집숍이다. 전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메이드 인 시드니(Made in Sydney), 포틀랜드 메이드(Portland Made) 등 로컬 상품을 모아 놓은 기념품 상점을 공항과 주요 관광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로컬 브랜드가 강한 미국 포틀랜드에서는 포틀랜드 메이드, 메이드 인 오리건(Made in Oregon), 텐더 러빙 엠파이어(Tender Loving Empire) 등 다양한 민간과 공공 편집숍이 중심지뿐 아니라 일반 동네 상권에서도 활발하게 영업한다. 로컬 브랜드가 여행자뿐 아니라 주민들에게도 인기가 있단 걸 알 수 있다. 포틀랜드의 로컬 편집숍에는 전통적인 특산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패션, 가구, 디자인 소품, 음식 등 그 동네에서만 살 수 있는 로컬 브랜드를 한 곳에 모아 판매한다.
로컬 편집숍의 전형은 일본의 디앤디파트먼트다. 이 기업은 한 지역에 입점하면 그 지역의 오래된 브랜드를 수집하는데 길게는 50년 이상 된 브랜드도 있다. 일반적으로 매장 구성의 반은 그 지역에서 온 것이고 나머지 반은 일본 전역에서 수집한다. 매장은 ‘롱 라이프 디자인’이 담긴 지역의 물건에 현대적 감각을 더해 제작자의 생각을 전하는 가게로서 오래도록 사랑받은 지역의 일, 물건을 소개, 지역주민들이 롱 라이프 디자인을 즐기는 교류의 장으로 기능한다.
창업자 나카오카 겐메이는 2000년 도쿄 세타가야에 첫 디앤디파트먼트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지역의 개성을 이해하는 장소로서 47개 도도부현에 설립하는 것이 목표다. 그는 이곳을 “일본 개성에 대한 이해와 발전을 위한 네트워크”이자 “디자인이라는 젊은 감성이 존재하는 관광안내소 같은 잡화점”으로 설명한다.
디앤디파트먼트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진출한 지역은 서울 한남동이다. 한국에서도 오래된 생활용품을 판매하며 제품의 반을 한국에서 조달하고, 나머지 반은 일본에서 수입한다. 디앤디파트먼트가 한국에서 수집한 50년 이상 된 로컬 브랜드는 말표 구두약, 모나미 볼펜, 아피스 만년필 등이다.
필자는 한국에서 만년필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그곳에서 처음 알았다. 대학 본부에서 일하면서 외국 손님이 오면 학교 마크를 찍은 독일제 라미펜을 선물했는데 한국제 만년필이 아닌 것이 왠지 창피하게 느껴졌다. 아피스 만년필은 1970년대 300만 개의 만년필을 팔았고 배우 정윤희를 광고 모델로 고용할 정도로 규모가 큰 회사였다고 한다. 지금은 생산을 중단했지만 부산 남부민동에 가면 아피스 거리로 불리는 생산 시설이 근대 문화유산으로 남아있다. 2021년 3월 기준, 아피스 만년필은 재고 소진으로 더 이상 디앤디파트먼트 매장에서 판매되진 않는다.
왜 아피스 만년필의 존재를 몰랐을까 자책하면서 제품 관련 기사를 검색하니 이 만년필에 대한 감동적인 스토리를 찾았다. 2001년 8월 23일 <매일경제 > 기사다. 제목은 “구제금융 땐 외제 만년필 졸업장엔 국산으로 서명… 몽블랑 VS 아피스”다.
“1997년 11월 21일 임창열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프랑스제 몽블랑 만년필로 IMF 구제금융 신청서에 서명했다. 그로부터 3년 9개월 뒤인 2001년 8월 22일.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는 IMF 졸업장이라 할 차입금 최종 상환 결재서류에 서명하면서 국산 아피스 만년필(상표명 임페리얼 )을 썼다. 아피스 만년필은 한은의 화폐금융박물관에 모셔진다. 전 총재는 “정말로 감개가 무량하다”며 자신이 서명한 결재서류와 만년필을 한은 박물관에 전시해 두고두고 기념토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 만년필은 전 총재가 “역사 깊은 서명”을 위해 특별히 국산으로 준비토록 지시해 마련된 것이다. 비서실 관계자는 “서명용 만년필을 주문했더니 아피스 측이 IMF 졸업 서명을 위해 쓴다면 무상으로 기증하겠다고 해 그 의사를 존중해 받았다”라고 설명했다. 수십만 원대를 호가하는 몽블랑으로 IMF체제를 시작했지만 5만 원짜리 국산 만년필로 졸업한 셈이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IMF체제 3년 9개월은 국민들의 생활과 의식 속에 서명용 만년필만큼이나 커다란 변화를 몰고 왔다”라고 촌평했다.” _ <매일경제> 2001.8.23.
일본 기업이 우리가 잊어버린 오래된 브랜드들을 다시 소개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속상한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로컬 브랜드숍을 통해 한국의 오래된 브랜드를 중시하는 문화를 살려야 한다.
탈산업화의 여파로 무엇을 하던 개성과 특색을 내세워야 하는 시대가 왔다. 한국에서도 로컬 브랜드를 소개하는 편집숍이 늘어나는 추세다. 2016년 봄 인스토어 탑동, 2017년 6월 인스토어 중문, 2018년 11월 사계생활 등 제주에서 3개의 로컬 편집숍을 운영하는 로컬 콘텐츠 그룹 재주상회가 로컬 편집숍 시장을 주도한다. 매장들 중 가장 큰 편집숍이 서귀포 사계리에 위치한 ‘사계생활 ’이다. 단순히 있는 브랜드를 모으는 것이 아니다. 로컬 브랜드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일부는 OEM 방식으로 위탁 생산하는 등 로컬 브랜드의 플랫폼 기능을 수행한다. 제주 매거진 〈iiin 〉을 발행하는 로컬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로컬 편집숍을 통해 로컬 플랫폼 비즈니스를 시작한 것이다.
전통적인 대량생산 대량소비 산업인 유통과 건설업도 로컬 브랜드 판매를 늘린다. 제주시 탑동 이마트 매장에서도 로컬과 제주 사인을 만날 수 있다. 관광지에서 영업하는 이마트 탑동점은 관광객이 제주도에서 무엇을 사야 하는지를 소개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로컬 브랜드를 수집해 농산물, 유제품, 식가공 제폼뿐 아니라 로컬 디자인 상품도 같이 판매하는 이유다.
대기업이 아무리 지역화해도 지역 마케팅을 위해서는 로컬 브랜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로컬 브랜드에 대한 수요가 높다 보니 요즘 알려진 로컬 브랜드를 가진 사업자는 매우 바쁘게 활동한다. 여기저기서 컬래버 요청을 받는다. 대기업이 로컬 맛집을 유치하는 것은 전국적으로 익숙한 현상이 됐다. 로컬 맛집으로 시작된 로컬 브랜드 입점이 수제 맥주, 전통주, 디자인 상품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들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기업은 대부분 전국 기업이다. 정작 지역 기업은 전국 기업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스템을 따라가느라 로컬 브랜드에 관심이 없다. 탑동에서도 로컬을 외치는 슈퍼마켓은 이마트지 제주에서 가장 큰 지역 슈퍼마켓인 마트로가 아니다.
디앤디파트먼트 매장을 제주로 유치한 기업 또한 천안 기반 외지 기업 아라리오뮤지엄이다. 디앤디파트먼트 유치는 현재 진행되는 아라리오타운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2014년 제주 탑동에 4개의 미술관과 미술관 주변에 4개 상업시설을 오픈한 1단계 도시재생사업을 시작한 아라리오뮤지엄은 2020년 5월 2단계 사업으로 상업시설, 호텔, 창업 지원 시설을 포함한 작은 도시를 건설하는 아라리오타운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세계 도시재생 역사상 민간 미술관이 한 지역을 작은 도시로 재생한 유일한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2014년 10월에 오픈한 1세대 가게는 에이팩토리 베이커리, 에이팩토리 카페, 일이탈리아노, 탑동 왕돈까스다. 아라리오가 직영하지 않았지만 초기부터 맥파이 매장이 입점했었고, 비밥스 매장이 길 건너 있었다. 캘리포니아 풍의 패션 편집숍 비밥스가 동네와 잘 어울렸다.
2016년 당시 필자는 1단계 사업을 아라리오길 조성이라고 불렀다. 그때 아라리오가 만든 지도를 보면 사업의 규모를 알 수 있다. 2단계 사업의 가장 큰 변화는 단지 내 골목길의 조성이다. 아라리오길이 대로변에 뮤지엄과 상업시설에 배치했다면, 아라리오타운은 골목길을 만들고, 골목길로 이어진 타운을 조성했다. 아라리오뮤지엄이 제공한 조감도에서 볼 수 있듯이 골목길이 아라리오타운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앵커시설도 이제 투톱 시스템이다. 아라리오뮤지엄과 더불어 편집숍, 식당, 스테이를 운영하는 디앤디파트먼트가 투톱이다. 제주 지역발전 차원에서 주목해야 할 시설이 디앤디파트먼트 편집숍이다. 매장을 둘러보니 1/3이 제주 브랜드, 2/3이 일본 브랜드였다. 일본 브랜드도 디앤디파트먼트가 추구하는 ‘롱 라이프 디자인’ 브랜드다. 오랫동안 유지된 브랜드만 찾다 보니 로컬 브랜드 발굴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제주 브랜드는 주로 공예, 식가공 제품 중심으로 편집했다고 한다.
아라리오타운 프로젝트의 기본 콘셉트는 ‘로컬 편집숍이 앵커하는 로컬 플랫폼’이다. 도시재생을 통해 낙후 건물을 재생하고 이를 통해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로컬 브랜드의 창업과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플랫폼을 건설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디앤디파트먼트 편집숍의 개장으로 제주 로컬 브랜드는 새로운 플랫폼을 얻었다. 앞으로 많은 제주 브랜드가 이 플랫폼을 통해 전국, 세계로 진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에서 편집숍 기반 로컬 브랜드 플랫폼이 활성화되려면 한국의 대기업과 지자체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유통과 호텔 분야의 한국 대기업이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하려면 한국의 로컬 브랜드가 더 풍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로컬 브랜드가 충분하지 않으면 유통과 여행을 통해 외국 관광객에게 한국의 매력을 보여주기 어렵다.
대기업이 문화 정체성 구현을 위해 로컬 브랜드를 지원하고 이들과 협업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상생이다. 대형마트의 영업시간을 제한하거나 대기업이 ‘노브랜드’와 같은 플랫폼으로 소상공인 제품의 판로를 열어주는 등의 방식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필자는 지자체 강연에서 로컬 브랜드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한다. 지역의 미래는 로컬 브랜드다. 중앙 산업을 지원하는 지역의 교육과 투자는 현재 수준이면 충분하다. 여유 자원은 지역다운 산업을 개척하는 로컬 크리에이터 인재 육성에 투입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역다움이 무엇인가. 다른 지역이 못하는 비즈니스가 지역다운 비즈니스다. 다행히 대기업과 지차제의 사고와 별개로 로컬 경제가 확장하고 있다. 현재 추세가 이어진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로컬 브랜드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대기업과 지자체를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