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보자. 제주는 도시여행자에게 좋은 도시가 아니었다. 마을과 떨어진 숙소에 머물면서 버스나 자동차를 타고 관광지를 찾아가는 전형적인 리조트형 관광지였다. 가장 큰 도회지인 제주시에서도 걸으면서 오밀조밀 개성 있는 도시문화를 발견하고 즐길 수 있는 골목길을 찾기 어려웠다. 미술평론가 유홍준은 제주시에서 도시문화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중심 광장의 부재에서 찾았다.
제주에 이런 광장이 없다 보니 제주시에 머무는 관광객들은 저녁에 다운타운으로서 제주를 느끼러 나갈 공간이 없어 모두 호텔방에 머물거나 노래방과 술집을 전전할 뿐이다.
도시여행자에게 골목상권의 부재는 치명적인 결함으로 다가온다. 도시의 번잡한 거리와 경적 소리, 마음과 숨을 멎게 만드는 스모그, 과도하게 경쟁적인 도시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자연을 찾아 여행을 떠나지만, 막상 자연에 도착하면 곧 금단 현상의 고통으로 괴로운 사람이 도시여행자다. 아름다운 숲과 강변에서 사색하며 산책하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처음 보는 친구와 대화하는 일이 물론 즐겁지만, 이 즐거움이 하루 종일 지속되지는 않는다. 생각보다 빨리, 도시가 그리운 순간이 덮친다.
도시의 유혹은 이른 아침에 시작된다. 아침에 일어나면 방 안에서 아침 식사를 기다리고 싶지 않다. 거리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네 사람에게 우연히 인사를 건네고 싶어 진다. 커피 향이 가득한 커피전문점, 빵을 굽는 아담한 베이커리를 거리에서 만나길 기대하면서.
긴 오후도 리조트에서 모두 채울 수 없다. 산책, 트레킹, 수영을 하고, 호텔 방에서 대화와 독서를 즐기지만 오후의 무료함은 반드시 찾아온다. 이때에도 도시의 거리로 발걸음이 향한다. 골목골목을 다니며 작은 책방과 숨은 카페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어진다.
마을과 격리된 호텔의 생활이 가장 어려운 시간은 저녁이다. 호텔 식당에서 식사하고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시면 무언가 놓치는 것 같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여행지의 문화를 체험할 그런 기회를. 지역 재료를 요리하는 맛집, 다양한 디저트와 커피로 유혹하는 카페, 평소 접하지 못하는 지역 콘텐츠를 판매하는 동네서점, 지역 주민이 모이는 포장마차와 바가 즐비한 거리로 나가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기 어렵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계적인 해변 관광지는 모두 매력적인 도시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카멜, 뉴포트비치, 하프문베이, 멘도시노 등 미국 캘리포니아의 해안 관광지는 걸어서 쇼핑과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작은 골목 도시다.
제주와 자주 비교되는 하와이, 발리도 그들만의 특색 있는 도시 문화를 자랑한다. 이들 휴양지가 자연과 리조트만을 내세워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전하지 않았다. 해변과 산만큼 도시 문화가 발전한 섬이 하와이와 발리이다. 호놀룰루 도심 상권과 바로 연결된 와이키키비치뿐 아니라 노스비치의 조그만 해변에서도 아기자기한 가게가 들어선 작은 마을을 만날 수 있다. 발리도 마찬가지다. 갤러리, 공방, 맛집이 모여있는 우붓의 도시 문화가 발리를 가고 싶은 도시로 만든다.
아쉽게도 제주는 골목 도시가 아니었다. 제주시, 서귀포시, 한림, 모슬포 등 크고 작은 도시를 보유한 인구 60만의 제주에 오롯한 골목상권이 없었다. 자연, 올레길, 바다, 오름, 그리고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홀로 서있는 박물관, 미술관, 카페가 새로운 여행 트렌드로 자리 잡은 도시여행자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런데 도시문화의 '변방'이었던 제주가 변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중심은 제주시 원도심이다. 이 곳에 개성 있는 가게들과 제주의 젊은이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새롭게 골목상권으로 뜬 지역은 '탑동'으로 불리는 원도심의 북쪽 해변가 지역이다. 탑동 해변가에는 호텔, 상가, 문화시설이 집중해 있고, 중심 도로 탑동로의 남쪽의 이면 도로를 중심으로 골목상권이 형성돼 있다. 이 골목상권에 흑돼지거리가 조성되고, 올댓제주, 미친부엌 등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맛집이 들어선 것이다.
탑동의 골목문화를 즐기는 사람은 제주에서 일하는 젊은 직장인들이다. 대학생이 모이는 시청 주변 상권이 제주의 ‘신촌’이라면 탑동은 경제적 여유가 있고 현대적 도시 문화를 선호하는 전문직들이 주로 찾는 제주의 ‘홍대’다.
원도심은 골목 창업자에게도 매력적이다. 올댓제주 김경근 오너 셰프는 원도심 골목길에서 자신이 원하는 가게를 열고 싶었다고 한다.
저희는 처음부터 술을 마실 수 있는 도민 상대 비스트로를 하고 싶었으니까요. 도심에 있어야 도민 단골손님이 생길 수 있고요. 제주도는 버스 등 대중교통이 발달한 곳이 아니라서 외곽에 있으면 술을 마시고 귀가하기가 어렵잖아요.
낙후됐던 탑동 지역이 어떻게 젊은 직장인과 창업자가 좋아하는 골목상권으로 되살아났을까? 원도심 상권과 가까운 점도 상권 부활에 일조했다. 과거보다는 활력을 잃었지만 제주 원도심은 아직도 전통시장 동문시장뿐 아니라 음식점, 공방, 의류전문점, 공예품가게 등이 살아있는 중요한 상권이다.
관덕정, 칠성로, 무근성, 오현당 등 문화유적지를 중심으로 골목길 투어를 운영하고, 탐라문화제, 프랑스영화제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해온 지역 시민단체와 문화단체도 원도심 문화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탑동 지역이 도시여행자가 좋아하는 골목상권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분기점은 새로운 도시기획자의 등장이었다. 2014년을 시작으로 무려 4개의 미술관을 탑동에 개장한 아라리오뮤지엄 김창일 대표가 그 사람이다. 그가 미술관을 연 목적은 도시재생이었다.
원도심 재생에는 문화가 있어야 한다. 제주시 탑동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뒷골목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세련미가 조금 더해지면 세계에서 주목받는 제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아라리오뮤지엄은 탑동시네마, 바이크샵, 동문모텔 I, 동문모텔 II 등 4개의 미술관을 운영하는데, 흥미로운 점은 미술관의 시설과 위치다. '1호점' 탑동시네마는 아라리오 복합문화단지의 중심 ‘가게’다. 탑동시네마를 중심으로 미술관 단지를 건설한 아라리오뮤지엄은 단지 내에 돈까스집, 베이커리, 수제맥주집을 입점시키고, 건너편에 건물을 매입해서 이탈리아 음식점과 카페를 직영한다.
2호점 바이크숍은 이 단지의 옆 건물에 입점했다. 최근 개장한 동문모텔 I과 동문모텔 II 미술관은 탑동시네마에서 남동 쪽으로 걸어서 15분 거리인 산지천에 위치해 있다. 이 네 미술관의 지도를 보면 이들이 마치 탑동 상권을 에워 쌓은 것처럼 보인다.
골목상권 개척에 대한 아라리오의 야망은 직영점 운영에 그치지 않는다. 직영 베이커리 ‘에이팩토리베이커리’에서 아라리오 미술관들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제공하고 지도에 주변 맛집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지도를 보면 탑동시네마에서 시작해 동문모텔 II에서 끝나는 '아라리오길'이 탑동 상권의 중심 골목길인 것처럼 보인다.
아라리오뮤지엄은 새로운 시각으로 탑동 골목상권을 체험할 수 있는 ‘제주 데이 트립’도 운영한다. 참여자들이 탑동 골목의 삶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살펴보고, 새로운 도시 문화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이다. 아라리오뮤지엄을 시작으로 단지 내 직영점 ‘탑동왕돈까스’와 ‘맥파이브루어리’를 방문한 후, 아라리오뮤지엄 4 개관에서 열리는 다채로운 전시를 전문가의 해설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아라리오뮤지엄 프로젝트에 대한 전문가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문화예술가 백용성은 예술경영적 접근방식으로 상업시설을 운영하는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원도심 재생 사업과의 시너지도 긍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인사이드 기자 이재정은 “아라리오의 예술(미술을 포함한) 프로그램이 제주시의 원도심 재생과 분명한 비전이 공유되면서 안정적으로 관광객이 찾기 시작한다"라고 전한다.
우리가 아라리오 프로젝트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도시재생 모델의 혁신성에 있다.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폴게티 미술관, 서울 대림미술관 등 개인이나 정부가 미술관을 건설해 도시문화를 업그레이드하고 재생한 사례는 많다. 하지만 개인 미술관이 복합문화단지를 건축해 상업시설을 직영하고 주변 상권을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한 사례는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아라리오 프로젝트는 또한 한국에서 민간 주도 도시재생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준다. 주민 의견 수렴의 어려움으로 제주도는 원도심 재생 사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제주도자유도시개발센터(JDC)가 아웃렛을 건설하는 계획이 무산됐고 원희룡 지사가 추진하는 '관덕정 광장 사업'의 미래도 불투명하다.
아라리오뮤지엄같이 하나의 미술관이 도시를 재생할 수 있다면 정부가 굳이 이를 무리한 일정에 따라 추진할 필요가 있을까? 민간 재생 사업을 지원하면서 주민의 공감대가 형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현명한 정책일 수 있다.
홍대앞, 가로수길, 이태원 등 서울의 골목길들이 성장한 역사를 보면 골목길의 변화는 민간에서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싼 임대료를 찾아 문을 연 한 가게가 성공해 유동인구를 유발하고, 이를 본 다른 가게가 진입해 상권을 형성한 것이 골목상권의 일반적인 역사다. 탑동에서는 아라리오뮤지엄이 골목상권 활성화에 필요한 유동인구를 창출하는 '첫 가게'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아라리오 프로젝트가 완성됐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탑동을 제주의 홍대라 부르기엔 아직 유동인구와 가게의 밀집도가 부족하다. 상권 이곳저곳에 빈 가게, 실패한 가게가 보이는 것도 아라리오뮤지엄과 다른 도시혁신가들이 아직 이 골목길에서 할 일이 많음을 시사한다.
그렇다고 아라리오 프로젝트의 의미는 희석되지 않는다. 정부의 개입과 지원을 요구하지 않는 민간 주도의 도시재생이 지속 가능하기 때문이다. 좀 더 많은 문화혁신가와 도시기획자들이 창의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우리 도시의 골목상권을 조성한다면, 그게 바로 우리가 원하는 도시와 골목길의 미래가 아닐까?
아래는 참고한 글입니다.
김지혜, “제주도 문화예술과 관광자원 Ⅰ-제주 문화예술 현장과 관광자원의 공생”, 예술경영, 2015
백용성, “제주도문화예술과 관광자원 Ⅱ-제주에부는 다양한 문화예술의 바람들”, 예술경영, 2015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주편, 창비, 2012
이소진, “동문모텔Ⅱ개관…문화재생 발판 기대", 제민일보, 2015
이재정, “‘동북아문화예술지구 ARM’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도시 제주”, 이코노믹리뷰 인사이드 2015
정다운, 제주에서 뭐 하고 살지?, 남해의봄날,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