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군의 가장 큰 지역 사업은 2019-2021년 진행되는 <서핑 해양레저 특화지구 조성사업>이다. 총 22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양양을 한국을 대표하는 서핑도시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지금도 양양은 한국의 서핑 중심지다. 관내 13개 서핑 해변이 국내 서핑 인구의 45%에 해당하는 연 50만 명의 서핑 방문자를 유치한다. 전국 서프샵의 60%에 달하는 70개의 서프샵이 양양에 위치해 있다. 양양군은 서핑산업의 지역경제 유발효과를 300억으로 추정한다.
서핑산업을 주도하는 서프샵은 영세 기업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북면에서 서핑 전용 해변을 운영하는 서피비치는 피크 시즌에 정직원 20명을 포함 총 90명을 고용하고, 100억 원에 가까운 매출을 올리는 강소기업이다.
양양을 라이프스타일 도시로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경제 효과만이 아니다. 해양스포츠가 주민문화로 정착한 최초의 도시가 된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인 해양국가다. 부산, 인천, 울산, 포항, 군산, 목포, 강릉 등 주요 도시도 대부분 해안에 위치한 항구도시고 다양한 해양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해변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항구도시는 해양스포츠를 외지인을 위한 관광산업으로 인식한다. 항구도시의 지도자들은 해양 스포츠에 투자하기에 앞서 과연 그 지역 주민이 즐기지 않는 활동에 외지인이 참여하기를 원할 것인지 자문해야 한다.
그렇다면 양양은 어떻게 해양스포츠를 주민문화로 만들었을까?
양양에서 정확하게 언제 서핑이 시작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대략 2008년 즈음에 부산을 떠난 서퍼들이 파도가 높고 방파제가 없는 죽도해변에 몰리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작 연도는 불확실하지만 2013년 시점에는 양양군이 홍보할 정도로 서핑 중심지로 부상했다.
조용한 어촌마을에 관광객을 위한 시설이 처음 들어온 시기는 디셈버펜션이 개장한 2006년이다. 2009년 처음으로 서프샵이 입점했다. 서프샵 1호점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동산항 블루코스트다. 이후 연이어 서퍼911 등이 죽도해변에서 오픈했다.
죽도해변은 해마다 늘어나는 서퍼들과 그들을 위한 숙박시설, 상업시설이 어우러져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사람이 모여 살면서 자연스럽게 서핑마을이 형성됐다. 예상대로 내가 방문한 죽도해변의 골목길은 이미 서퍼들을 위한 시설들이 즐비한 서퍼거리로 변신해 있었다.
서핑 마을은 동서로 3블록, 남북으로 2블록 규모의 작은 마을이다. 중심 도로는 북쪽 동산항구 입구에서 시작해 남단 인구초등학교에서 끝나는 인구중앙로다. 2017년 처음 죽도해변을 방문했을 때 이 길과 주변 도로에 단일 해변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15개의 서프샵들이 모여있었다. 당시 죽도해변 서프샵 중 원주민이 운영하는 곳은 한 곳이고, 나머지는 외지인이 창업한 가게였다. 대부분 서핑이 좋아 직장을 떠나 타지에 가게를 연 사람들이었다. 현재는 동산항(4), 죽도해변(16), 인구해변(6)을 합쳐 대략 26개 정도의 서프샵이 성업 중이라고 한다.
서핑 장비를 빌려주고 초보자를 강습하는 서프샵은 제법 장사가 되는 사업이다. 임대료와 강습료를 포함해 1인당 8만 원을 지불해야 하는 고객이 성수기가 되면, 하루 100명을 훌쩍 넘는다. 서프샵 하나가 800만 원 이상의 하루 수입을 올릴 수 있다.
2017년 이후 죽도해변에 인접한 인구해변에 서프샵을 비롯한 상업시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일부에선 인구해변에 새롭게 형성된 거리를 양양과 경리단길의 합성어인 양리단길이라고 부른다.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경리단식 골목상권이 양양으로 진출한 것이다.
양양에서 서핑이 주민문화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서퍼의 라이프스타일이다. 서퍼, 특히 서프샵을 운영하는 서퍼에게 서핑은 일이자 삶이다. 서핑 스팟에서 정착해야 운영할 수 있는 비즈니스가 서프샵이다.
서퍼 특유의 문화도 한몫한다. 전업 서퍼들은 세속적 가치와 남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레게이헤어, 염색, 문신, 액세서리, 선탠 등 전형적인 서퍼 패션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이들만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서핑을 소재로 한 다음 웹툰 <파도를 걷는 소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내 서퍼들 특유의 라이프스타일이 대중문화 콘텐츠가 된 예이기도 하다.
그들의 강한 개성은 서핑 마을 외관에서도 두드러진다. 서핑 마을의 노란색과 주황색 건물이 주는 이국적인 분위기는 강렬한 첫인상으로 남는다. 서퍼들이 하와이를 연상케 하는 원색의 페인트로 집들을 칠했다고 한다. 정체성이 강한 사람들이라 패션뿐 아니라 건축에 대해서도 자신의 색깔을 입히려는 것처럼 보인다.
서프샵 전업 서퍼들만 마을 주민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서퍼를 위한 음식점과 바를 운영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 대부분도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상업시설은 중심 도로인 인구중앙로, 거기서 죽도암으로 이어지는 새나루길, 그리고 배후 골목길에 골고루 분포돼 있다.
특이하게 서핑마을에서 인기 있는 음식점은 거의 모두 외국 음식을 파는 곳이다. 서핑문화가 미국에서 유래된 탓에 상권도 미국 식문화 중심으로 발전한 것이다. 수제버거 전문점 파머스키친과 서프독, 퓨전짬뽕집 나뽕남, 발리음식점 와룽빠뜨릭, 태국음식점 하이타이드 등이 죽도해변을 대표하는 맛집이다. 바비큐도 서핑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서퍼들이 캠프장이나 숙소에서 바비큐를 직접 요리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성수기에는 간이 바비큐 트럭도 나타난다.
서핑문화는 저녁에도 이어진다. 서핑을 마친 젊은이들이 저녁이 되면 술집과 바에 모여든다. 수제맥주 양양케미스트리가 2016년에 인구중앙로에 문을 열었고, 스톤피쉬, 서핑바911 등 개성 있는 술집도 성업 중이다. 성수기에는 몰려드는 서퍼를 위해 인구중앙로에서 야간 파티를 열기도 한다.
서퍼들이 자발적으로 협력한 덕분에 죽도해변에 자유로운 서핑 환경이 조성됐다. 2015년 서프샵들이 공동으로 죽도해변을 3년 임대했다. 서프샵들이 서핑 공간을 확보했기 때문에 성수기에도 해수욕객과 서퍼들이 충돌하지 않고 바다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서퍼들이 공유하는 라이프스타일이 그들만이 추구하는 공동체 문화를 가능케 한 것이다.
15개의 서프샵과 비슷한 수의 상업시설이 아담하게 들어선 서핑마을에서도 임대료 상승에 대한 우려는 존재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평당 6-700만 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여유로운 마을 공간에서 부동산 과열을 감지하기 어렵다.
죽도해변이 속한 행정 구역인 현남면 인구리에는 아직 서핑 마을이 확장할 공간이 남아있다. 인구중앙로와 새나루길이 교차하는 지점의 남쪽은 조용한 시골마을이다. 서핑 관련 상권과 시설이 학교, 면사무소, 우체국, 시장이 모여있는 현남면 중심가까지는 미치지 않는 것이다. 여유 공간을 고려할 때 당분간 젠트리피케이션 압력을 우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서핑마을이 더 확장된다고 해도 마을의 성격상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재현될 가능성은 낮다.
워낙 서퍼들의 문화와 취향이 독특해 그들이 프랜차이즈 가게를 애용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지금도 죽도해변에서 성공한 가게들은 서퍼들의 기호가 반영된 곳이다. 노래방, 단란주점, 체인점등 서핑문화와 어울리지 않는 점포들은 이곳에서 찾기 어렵다.
서핑마을을 찾는 서퍼들이 크게 늘어나도 프랜차이즈가 진입할 가능성은 낮다. 서핑은 계절 스포츠이기 때문에 비수기에는 가게 문을 닫을 정도로 손님이 없다. 자영업자는 모르지만 프랜차이즈 가맹점이 비수기 휴업을 감수하면서 오픈하지 않을 것이다.
정주인구, 서핑산업, 로컬소비 문화
정체성을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서핑 마을에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주인구의 증가다. 죽도해변이 국제적 수준의 서핑 마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현재 100명 수준의 정주인구로는 부족하다.
정주인구의 성장은 서핑인구 전체 성장에 달렸다. 다행히 서핑인구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성수기에 죽도해변을 찾는 서퍼는 하루 2,000명에 달한다. 레크리에이션 서퍼는 앞으로도 꾸준히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서핑은 젊은이라면 한 번쯤 꿈꾸는 라이프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의 독립적이고 매력적인 라이프스타일도 서프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기후와 자연환경이 서핑을 하기에 알맞은 캘리포니아에는 매년 전 세계 서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양양을 찾는 서핑인구가 늘면 서핑산업 정주인구도 증가할 것이다.
인구가 감소하는 양양에서 젊은 세대 중심의 서핑 라이프스타일과 새로운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해양스포츠가 지역발전의 미래다.
미국의 서핑 중심지 캘리포니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퍼 패션 브랜드, 서프보드 제작 회사가 많은데, 매출 규모는 연간 80억 달러에 이른다.
한국 서핑산업의 경제적 규모는 아직 크지 않다. 서핑인구가 수만 명으로 늘어난다 하더라도 국가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중요한 산업으로 자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핑의 가치는 사람을 끌어 모으고 지역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서핑이 좋아 양양을 찾은 창조인재가 직접적으로 서핑산업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지역경제의 성장을 이끌 수 있는 기업을 창업하는 미래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서핑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로컬소비 문화의 정착이 중요하다.
아무리 서핑인구가 늘어도 국내 소비자가 외국 서핑장비만 선호하면 국내 서핑장비 산업이 성장할 수 없다. 일정 규모의 서핑산업을 원한다면 서퍼 자신들이 로컬소비로 서핑 장비의 국산화와 산업화를 지원해야 한다. 서프 산업이 현재의 서프샵과 부대 서비스업을 넘어 장비와 패션 제조업으로도 발전해야 서퍼들이 원하는 규모의 서핑산업과 서핑인구가 형성된다.
우리는 오랫동안 산업사회를 대변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동경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미래에는 달라져야 한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탈물질주의 혁명은 우리로 하여금 라이프스타일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도, 국가경제의 경쟁력을 위해서도 이제 개성, 자유, 삶의 질에 기반한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탈물질주의는 서핑도시에서 살아있다. 탈물질주의 라이프스타일로 사는 서퍼들의 도시는 달라야 하고 실제로 다르다. 내가 양양의 서핑 정체성이 유지될 것으로 믿는 이유다.
1차 수정 - 2020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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