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4일 폴인과 어반플레이가 주최한 성수동 랜선비즈니스투어에서 강연하고 대담한 내용의 기록입니다.
이 문장으로 강연을 시작해보려 합니다.
성수동은 라이프스타일이다.
지역과 라이프스타일이 어떤 관련이 있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성수동이 특별하다고 말하려면 다른 지역에서 경험할 수 없는 라이프스타일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성수동의 정체를 밝히려면 이곳의 라이프스타일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라이프스타일은 개개인의 삶을 말하기도 하지만, '나'라는 관점을 넘어선 '취향 공동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수동에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지 알아야 한다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요.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대 초반부터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하면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어요. 세계적인 라이프스타일의 유형과 역사*를 보면 '부르주아'에서 '보헤미안', '노마드' 세대로 나아갑니다. 한 마디로 설명하면 물질주의에서 탈물질주의로의 이동이에요. 소비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는 거죠. 이런 변화 단계를 '모던→포스트모던→라이프스타일(소셜)'로 요약할 수 있는데요.
소위 '가성비'를 따지는 물질 중심적인 소비 방식에서 점차 환경과 공동체 등 추상적인 가치에 무게를 두는 소비를 지향하게 됩니다. 매년 발표되는 다양한 트렌드 키워드는 개성과 다양성, 삶의 질 그리고 사회가치 등 4가지로 압축할 수 있어요.
기술 역시 물질 그 자체가 아닌 추상적인 가치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해요. 개인 해방, 사회 가치, 4차 산업혁명과 같은 기술 트렌드 키워드만 봐도 알 수 있죠. 지금의 성수동은 포스트모던을 넘어 라이프스타일 소비자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주목받고 있어요.
우리의 가치관이 물질주의에서 탈물질주의로 넘어가면서 라이프스타일을 향한 욕구는 점점 더 강하게 드러나고 있어요. 그러면서 로컬의 중요성도 더욱 커지고 있죠. 라이프스타일이 로컬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먼저 '환경'에 대한 고민 때문입니다. 기존의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방식을 벗어나 지역에서 소규모로 생산된 제품을 소비하는 것이 더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공동체로서 연대를 추구하기 때문이기도 해요. 아는 사람이 아는 지역에서 만든 제품을 신뢰하는 것처럼요. 무엇보다 '나다움'이라는 정체성을 찾기 위해 가장 가까운 동네부터 관심을 두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기업, 산업, 도시, 나아가 국가까지도 정체성으로 경쟁하죠.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자원, 곧 로컬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라이프스타일에 기반을 둔 로컬 지향 현상이 나타난 건 2016년부터예요. 농산어촌 지향, 중소도시 지향, 동네 지향, 장소 지향, 고향 지향 등 크게 5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라이프스타일 성지 중 하나로 제주도를 꼽을 수 있는데요. 이미 2013년부터 『제주 보헤미안』이라는 책이 나오고, '제주도에 가면 진짜배기 히피 스타일이 있다', '핫한 제주, 디지털 노마드 성지로 더 큰 꿈 꾼다'와 같은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서울은 각 지역과 골목상권마다 각각의 개성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예요. 한남동은 부르주아 지역, 서교동은 보헤미안 지역, 테헤란로는 노마드 지역이라고 하는 식이죠. 성수동은 골목상권 전체로 보면 힙스터 문화라고 생각해요.
힙스터는 유행이나 주류 문화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데요. 히피와 다른 점은 히피가 전원으로 돌아간 반면, 힙스터는 도시에서 창업을 해요. 서울 골목길에 나타나는 현상은 힙스터에 가깝죠.
우리나라의 골목상권은 2005년 홍대를 포함해 4곳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2020년 12월 기준으로 전국 150곳, 서울에만 58곳 정도 퍼져 있는 것으로 추정해요.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골목상권은 그동안 비슷한 과정을 거쳤어요. 제가 쓴 『골목길 자본론』에서 골목상권이 성공하는 데 필요한 6가지 요소를 'C-READI'라고 정리했는데요.
문화 자원(Culture)이 풍부하고 임대료(Rent)가 저렴한 지역에 매력적인 브랜드(Entrepreneurship)가 하나 둘 생기면서 상권이 만들어지고, 접근성(Access), 공간 디자인(Design), 정체성(Identity)을 개선하면서 완성된 모습을 갖추죠*.*참고 : 폴인스토리 <뜨는 골목길의 6가지 조건, C-READI>
성수동은 6가지 성공 조건 중 몇 개나 충족할까요? 먼저 성수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여전히 합리적인 수준의 임대료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동구 건물주-임차인 상생협약'이라는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정책을 내놓기도 했죠. 또 이곳 성수동에서 소셜벤처가 번성하고 있고, 엔터테인먼트사와 게임 회사 본사가 들어오면서 기업 활동 또한 잘 정착되고 있다고 봐요.
여기에 지금보다 더욱 뚜렷한 정체성이 입혀진다면 지속가능한 로컬 생태계로서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성수동의 아이덴티티를 몇 가지 꼽아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서울의 브루클린'입니다. 공장과 그 건물을 이루는 붉은 벽돌, 지상전철 등이 이 지역의 이미지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죠.
또 성수동이 뜨기 시작한 2011년보다 8년 정도 앞서 나온 김진애 박사의 책 『우리도시 예찬』에서 성수동을 '보라색 앨리'라고 주목한 바 있어요. 준공업지역의 특성과 벤처단지를 결합한 우리나라의 실리콘밸리가 된다는 거죠.
하지만 성수동의 아이덴티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확장해 나가고 있어요. 현재 정부 차원의 노력 중 하나로 성수도시재생 주민기자단이 만드는 동네잡지 『성수동쓰다』를 발간하는데요. 이런 활동이 민간에서도 더 활발히 일어나서 성수동만의 색깔을 만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일본 도쿄 기치조지 거리에서 성수동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기치조지는 도쿄의 살고 싶은 지역 랭킹 상위에 손꼽히는 지역으로 이노카시라 공원의 여유로운 자연환경과 주택가 뒷골목의 감성적인 카페, 레스토랑이 어우러져 있어요.
일본 도쿄 기치조지(kichijoji) 거리의 모습. ⓒ모종린 제공
서울숲길과 연무장길을 포함한 성수동의 골목상권을 떠오르게 하죠. 뿐만 아니라 성수동은 강남과의 접근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청담동의 지역 특성이 많이 옮겨 왔어요. 그러면서 부르주아, 보헤미안, 힙스터 등 대부분의 라이프스타일 유형을 커버하고 있다는 점도 비슷해요.
앞서 말한 6가지 성공 요소를 갖췄다고 해서 모두 성공한 골목상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골목상권에 필요한 기본 경쟁력은 공간 차별성입니다. 북촌 한옥마을, 전주 한옥마을이 그랬듯 서교동이나 가회동의 단독주택 단지나 통영 동피랑 어촌마을 그리고 성수동의 공장, 창고는 그 지역의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내죠.
이처럼 특색 있는 골목상권은 '레트로 붐'과도 맞닿아 있는데요. 그래서 골목상권을 세련됨과 거리가 먼 낡고 오래된 곳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 어떤 분야보다 현대 기술의 힘을 많이 빌리고 있어요. 골목상권의 작은 상점들은 SNS나 위치기반서비스가 없으면 대기업 브랜드와 경쟁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작은 상점들로 시작한 골목상권이 점차 커지면서 업종도 진화합니다. 독립서점, 베이커리, 커피전문점, 편집숍 같은 골목 산업이 1세대라면, 각각을 연결하는 커뮤니티성을 강조한 2세대 문화산업이 그 뒤를 이어 들어오죠.
고객과 일회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교류와 협업을 하면서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예요. 복합문화공간이나 라운지, 코리빙, 코워킹스페이스 등이 여기에 속해요. 이런 생태계가 정착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3세대인 스타트업과 디자인, 화장품, 건축, 미디어 등 창조산업 기업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동네를 활성화합니다.
가로상권의 시초는 강남이었지만, 1990년대 홍대에서 예술가의 작업실, 아지트 문화가 만나 본격적으로 꽃 피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피카소 거리가 탄생했고,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 모델이 전국으로 확산됩니다. 이후 2010년대는 '인디 상점'의 영향력이 커졌어요. 독립서점,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처럼 예술가뿐 아니라 '장인'이라 할만한 예술가적인 소상공인들이 나타난 거죠.
이제 홍대는 스타일난다, 젠틀몬스터, 29cm처럼 '핫'한 패션, 뷰티 브랜드들의 무대가 됐어요. '홍대다운' 브랜드가 탄생하는 거예요. 홍대 골목상권은 상인과 예술가의 공도 있지만, 서울시와 마포구의 집중적인 투자도 한몫했어요. 특히 전철역과 경의선 숲길을 정비해 접근성을 높였고, 문화 시설을 확충하는 데 힘썼죠.
홍대를 잇는 우리나라의 비즈니스 생태계로서 성수동의 미래를 기대한다면 1세대 소상공인과 2세대 예술가 그리고 3세대 스타트업이 긴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지금 '성수다운' 브랜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해요.
성수동은 여러 공방과 갤러리, 문화재단 등의 문화자원이 있지만 앞선 모델인 홍대와 비교한다면 아직 부족한 상태예요. 또 외부 지역 간 접근성은 좋지만, 공간 디자인 차원에서 동네 안에 보행자가 걷기 어려운 길이 많습니다. 고가 전철이 동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데다 대부분 인도와 도로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죠.
그런 면에서 성수동은 미국 포틀랜드 사례*에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걷기 좋은 길에 사람이 모이고, 그들이 모여 협업하는 공동체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도시 생태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죠. 나아가 생태계가 생겨나면 주류 문화와 구분되는 하위문화도 발달해요.*참고 : 폴인스토리 <포틀랜드에 주목해야 하는 진짜 이유>
하위문화는 저항을 바탕으로 하죠. 요즘은 '힙스터'가 유행을 따르는 세련된 사람들을 뜻하는 단어로 통하지만, 본래 의미는 대중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만의 취향을 고집하는 부류를 말해요. 그렇다면 '성수동에는 어떤 저항 정신이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은 모 교수의 강연 후 랜선비즈니스투어의 모더레이터인 심영규 건축PD와 모 교수가 진행한 질의응답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심영규 건축PD(왼쪽)와 모종린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오른쪽)가 질문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폴인
성수동의 다양성을 표현하는 단어가 필요한 것 같아요. 성수동이라는 지역 자체가 워낙 넓기 때문에 작은 소구역으로 나눠서 각각의 특색을 키웠으면 해요. 연남동도 안을 들여다보면 12개 정도의 소구역이 있고, 더 작은 연희동조차 6개 구역으로 이뤄져 있어요.
사실 성수동 정도의 면적이면 연무장길, 서울숲길뿐 아니라 10개 정도의 거리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각 구역의 특징을 표현할 수 있는 일종의 유행어가 필요한 거죠. 예를 들면 이곳에 낡은 공장과 창고들이 모인 구역이 있는 반면 고급 주상복합이 들어선 구역도 있는 것처럼 그 둘을 구분해서 부르는 표현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이곳을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2021년 2월4일, 정부가 서울 주택 공급을 위해 준공업지역을 개발한다는 대책을 발표했어요. 성수동은 을지로, 문래동과 더불어 서울의 대표적인 준공업지역이고요.
그런데 성수동을 단순히 소비 지역으로만 보면 이 지역의 색깔을 살리기 어려워요. 생산자 중심의 도시 산업 생태계로 봐야 하죠. 우리나라를 먹여살릴 기업들을 여기서 육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단순히 역사와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감성적인 접근으로는 재개발을 막기 어려울 것 같아요.
가장 고민해야 할 문제는 건축 환경과 산업 입지의 관계입니다. 특정 건축 환경에서만 가능한 산업이 있어요. 그 지역에서만 성장할 수 있는 산업이 정해져 있다는 거죠. 지금까지 성수동은 물론 을지로, 문래동, 홍대만 봐도 그 동네에 어울리는 회사가 그곳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그 지역의 건축 환경을 바꾸게 되면 원래 자리 잡고 있던 산업마저도 남아 있을 수 없게 되겠죠.
이곳을 도시 산업 생태계로 육성한다면 예전처럼 산업단지를 만드는 등의 방식보다는 성수동의 개성에 맞는 커뮤니티를 지원하는 방식이 필요해요. 자생적으로 산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장인대학'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있어요. 크리에이터, 소상공인, 스타트업 등 각자의 커뮤니티가 협업을 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봐요.
기업들이 강남을 쉽게 떠난다는 건 그만큼 '별다른 문화가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과거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 강남에 모여 있을 때는 그것이 하나의 지역 문화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봤어요. 강남의 패션과 미용 인프라를 바탕으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냈죠.
그런데 최근에는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수직계열화하면서 자체 인력을 고용하기 시작하니 기존 지역 상권에 기댈 필요가 없어진 거예요. 사실 엔터테인먼트사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라이프스타일 문제라고도 보는데요. 그 지역의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브랜드나 비즈니스가 탄생해야 하는데, 그런 연결고리가 굉장히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나름대로 YG는 합정, 빅히트는 한남동, SM은 성수동에서 각 엔터테인먼트사가 그 동네의 문화로 뿌리내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조금은 비현실적일지 모르지만 그 지역의 문화 공간과 아티스트를 지원하면서 함께 관련 산업을 키워나가는 거죠.
특히 성수동은 소셜벤처가 모인 만큼 다른 산업들도 소셜한 성격을 띠기를 바라요. '소셜'이라는 가치관이 단지 기업 차원을 넘어서 지역의 생활 문화로 확산될 수 있는지 고민해 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산업센터가 여러 비즈니스를 수용하면서 성수동은 충분히 서울의 실리콘밸리가 될 수 있다고 봐요. 다만 단순히 편리한 공간만을 제공하는 것인지, 새로운 비즈니스를 위한 인큐베이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필요합니다.
성수동의 문화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 되려면 기업뿐 아니라 주민과 소상공인들까지 함께 연결돼야 해요. 또 한양대와 건국대가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성수동의 스타트업과 연계한 협업 구조는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것 같아요. 그 지역에 아무리 좋은 요소들이 있어도 그들을 적재적소에 연결해야 진정한 도시산업 생태계로 발전합니다.
출처: 폴인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