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터 경제의 성공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플랫폼과 더불어 창의적인 일과 삶의 공간적 환경을 제공하는 도시 플랫폼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크리에이터의 도시 플랫폼으로 기능할 크리에이터 타운은 어디서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가?
크리에이터 타운은 크리에이터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도시가 크리에이터가 모이는 도시가 되고 싶어 한다. 그만큼 도시의 전체 경쟁력에 크리에이터 타운이 제공하는 창의성과 감성이 중요해졌다.
크리에이터 타운에 대한 한국 도시 계획자의 일차적인 반응은 단지일 것이다.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크리에이터 산업도 기존 도시와 독립된 단지를 건설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정부는 상암디지털단지, 파주출판도시 등 콘텐츠 산업 단지를 조성했고, 일산 CJ라이브시티 등 앞으로도 더 많은 신도시형 콘텐츠 단지를 건설할 계획이다.
과연 기존의 단지형 콘텐츠 단지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대표적인 콘텐츠 단지인 파주출판도시의 사례를 보자. 파주는 출판문화, 커피, 북카페, 미술관, 건축물이 어우러진,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다른 도시가 부러워할만한 정돈된 단지다.
하지만 우리가 파주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새로운 책문화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크리에이터 타운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을까? 출판사 본사 중심으로 채워진 도시 디자인을 보면, 출판사 생산시설이 모여 있는 생산단지에 가깝다.
다른 한계도 쉽게 눈에 띈다. 첫째, 출판산업의 중심 크리에이터인 작가들이 파주에 거주하지 않는다. 출판사의 도시일 수 있는 있으나 크리에이터의 도시로 부르기에는 작가 인구가 너무 적다. 둘째, 도시 구조 또한 크리에이터 문화에 유리하지 않다. 구성원의 상호작용과 교류를 촉진하는 보행문화를 조성하기 어려운 자동차 중심 도시다.
신도시나 단지가 아니면 어떤 도시가 크리에이터 타운으로 적합할까? 하나의 방법은 크리에이터에게 직접 묻는 것이다. 예술가에게 예술가의 도시가 어디인지 물었는데 명확한 답을 주는 예술가가 없었다. 평창동에서 만난 한 화랑 주인은 프랑스 남부의 생폴 드 방스(Saint Paul de Vence)를 추천했다. 검색해보니 이곳은 파주의 헤이리와 같은 작은 예술가 마을이었다. 샤갈, 르누아르, 마네, 마티스, 브라크,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 수많은 예술가가 여름을 보낸 유서 깊은 마을이지만 독립적인 예술가 도시와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자족적인 예술가 도시를 찾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현대 도시에서 예술가는 도시를 구성하는 수많은 직업의 하나다. 예술가가 다수인 또는 주도하는 도시는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보통 예술가 도시하면 파리 생제르맹 데프레,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 등 대도시 안의 문화지구를 연상한다.
작가라면 한 번쯤은 이런 문화지구에서 글을 쓰고 다른 작가와 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작가는 유난히 도시의 한 모퉁이에 모여 사는 것을 좋아하는 듯하다. 프랑스 가톨릭 신학자 앙토냉 세르티양주(Antonin Sertillanges)가 '공부하는 삶 The Intellectual Life'에서 지적했듯이 속세와 떨어져 홀로 외로이 창작하는 작가에게 다른 작가와의 교류는 작가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활력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들이 선호하는 동네는 일반적으로 지식과 예술의 생산과 공유가 가능하고 물가가 저렴한 지역이다. 대학과 가까이에 있는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나 파리의 생제르맹 데프레가 한때 작가의 거리로 유명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서울도 지역문화 전통을 올바르게 계승했다면 대학가인 동숭동과 신촌이 예술가와 지식인의 동네로 성장했을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문화지구가 음악가나 화가보다는 작가와 지식인 중심으로 형성됐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공연장, 미술관 등 대규모 문화시설이 밀집된 지역에는 문화지구가 들어서지 않는다. 예술가와 작가가 모이고 모여 사는 문화지구는 문화시설과 더불어 카페, 서점, 술집 등 상업시설이 집적된 곳이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미국에서도 1960대 대학가 중심 문화지구가 점진적으로 후퇴한다. 과도한 상업화로 예술가가 떠나고, 대중문화와 상업 문화 중심의 새로운 문화지구가 대학가 문화지구를 대체했다. 1990년대 새롭게 부상한 문화지구의 대표적인 사례가 뉴욕의 독립서점, 독립출판의 중심지로 부상한 브루클린이다.
브루클린 문학 공동체의 중심은 독립서점이다. 독립서점들이 지역 작가와 독자를 연결한 새로운 출판문화와 공동체 문화를 창조했다. 2014년 '브루클린 매거진'에 20개 이상의 주요 서점이 소개될 정도로 독립서점은 지역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독립서점들은 지역 작가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한다. 브루클린 북 페스티벌 기간에는 저명 작가를 초대해 독서회와 저자 사인회를 연다. 평상시에도 거의 매일 독서회를 열고 커뮤니티 행사를 통해 브루클린 작가들의 작품을 홍보하고 판매한다.
브루클린에서 처음으로 독립서점을 연 가게는 파크 슬로프에 위치한 커뮤니티 북스토어다. 이 차분하고 세련된 서점은 지역사회의 구심점이자 폴 오스터, 시리 허스트베트(Siri Hustvedt), 니콜 크라우스(Nicole Krauss)가 자주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토론하고 다양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면 작가의 도시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지역의 유능한 작가를 발굴하고 독자와 직접 소통하도록 연결해주는 독립서점이 가득한 브루클린을, 우리는 문학 중심지로 여긴다.
브루클린의 독립서점은 적극적으로 지역주의(Localism) 전략을 추구한다. 이러한 특징은 서점 문만 열고 들어가도 금방 느낄 수 있다. 희귀본과 절판본을 전문으로 하는 덤보의 독립서점 피에스 북샵은 문 옆에 브루클린 기념품 전시대를 배치한다. 기념품에는 브루클린 작가의 작품도 포함돼 있다.
독립서점은 지역 독자와 작가가 만나고 대화하는 일종의 사랑방이다. 독자들은 독립서점에서 인터넷 쇼핑이 제공하지 못하는 문화와 가치를 체험할 수 있다. 다양한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은 작가에게 중요하다. 그들의 경험과 스토리가 작품의 소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중고 소설책을 파는 서점으로 유명한 윌리엄스버그의 북서그네이션은 더 적극적인 지역사회 연계 전략을 추구한다.
지역 작가를 지원하는 것 외에도 서점 공간을 다양한 지역사회 행사 공간으로 대여해 지역 공동체 발전에 기여한다. 독립서점뿐만이 아니다. 유통업계 전체가 인터넷 쇼핑으로 사슬이 풀린 소비자를 한 곳에 묶어 놓는 방법을 찾고 있다. 특히 은행, 커피전문점, 슈퍼마켓 등 지역에 매장을 가진 기업들이 공유 공간을 넓혀 동네 생활의 중심지, 동네 비즈니스의 플랫폼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서울 상황은 어떠한가. 홍대, 인사동, 서촌, 삼청동 등 고전적인 의미의 문화지구가 남아있고, 성수동, 한남동 등 새로운 문화지구가 등장했다. 그러나 서울의 문화지구는 갤러리, 미술관 등 문화예술 시설이 모여있는 지역이지 예술가와 크리에이터에게 도시 플랫폼을 제공하는 지역이라고 볼 수 없다.
예외가 있다면 홍대다. 예술가뿐 아니라 디자이너, 작가, 미디어 제작자 등 다양한 유형의 크리에이터가 모여 살고 활동한다. 홍대에서 가장 잘 발달된 크리에이터 커뮤니티 중 하나가 출판 커뮤니티다. 브루클린과 같이 커뮤니티 구심점으로 독립서점과 독립출판 클러스터가 형성되어 있다. 미국과 일본의 독립서점과 같이, 동네 거점으로서 주민에게 특별한 책을 소개하고 동네에서 구하기 어려운 문구류나 아트상품을 판매한다.
과연 홍대가 한국의 브루클린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땡스북스, 유어마인드, 북티크 등 홍대 독립서점 시장을 개척한 1세대 서점의 최근 동향을 보면 보헤미안 지구로서 홍대의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다. 이들 모두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규모를 줄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생태계다. 독립서점과 독립 출판사가 영업하는 장소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정한 의미의 브루클린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작가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구축이 필요하다. 주민들이 책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누고 독서를 즐기며,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통해 글을 쓰는 작가들이 많은 지역 문학 공동체가 작가의 도시 브루클린을 만들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홍대와 마찬가지로 다른 문화지구에 필요한 것은 생태계다. 크리에이터가 모이고, 이들이 집단지성을 발휘할 수 있는 커뮤니티와 이를 지원하는 문화시설을 도심에서 떨어진 외진 장소가 아닌 도심의 문화지구에 집적시켜야 한다. 크리에이터 타운의 경쟁력은 궁극적으로 문화자원과 이를 통해 형성된 정체성에 달렸다.
파주출판도시, 브루클린, 홍대의 교훈은 명확하다. 첫째, 전통적인 문화지구로는 크리에이터 타운을 조성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문화예술 시설의 유치와 집적을 넘어 크리에이터가 실제로 살고 활동하며 새로운 크리에이터 문화를 창출하는 크리에이터 커뮤니티의 조성이 필요하다.
둘째, 크리에이터 타운은 신도시나 도시 내의 고립된 단지보다는 건축자원, 보행환경, 문화자원이 우수한 원도심 지역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K-pop 기획사들도 신도시 환경의 강남을 떠나 원도심 골목상권인 성수동, 한남동, 홍대로 이전한다. 건축, 보행, 문화 조건을 만족하는 지역이 주거, 놀이, 업무 시설 등 크리에이터에게 필요한 커뮤니티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유리하다.
누가 크리에이터 타운을 건설할지도 중요한 이슈다. 정부 주도보다는 민간 중심, 민간 협력으로 크리에이터 타운을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직 초기 단계지만 로컬 크리에이터 중심의 마이크로 타운 조성이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많은 지역에서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직접 자신이 필요한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이 모델을 크리에이터 타운 조성에 활용하는 것이다.
도시 콘텐츠 그룹 어반플레이는 서울 연희동과 연남동 일대에서 복합문화공간, 로컬브랜드 편집숍, 코워킹 스페이스, 코리빙 플레이스, 공유키친, DIY숍, 스토리텔러와 아티스트 콘텐츠 공간 등 밀레니얼이 한 지역에서 일하고 살며 즐기는 데 필요한 공간과 시설을 건설한다.
부산 영도에도 최근 젊은이들이 일하는 메이커 스페이스와 복합문화공간, 거주하는 코리빙 플레이스, 그들에게 필요한 상업시설 등 총 5개 단지로 구성된 작은 도시가 들어섰다. 도시재생 스타트업 ‘돌아와요 부산항 연합 RTBP’이 쇠락한 조선소 지역에서 빈 공간을 활용해 일·주거·놀이를 통합한 삼위일체 도시 모델을 완성한 것이다.
어반플레이와 RTBP뿐이 아니다. 시흥의 빌드, 제주 재주상회, 군산 ㈜지방, 인천 개항로프로젝트, 속초 소호259, 순천 브루웍스, 목포 괜찮아마을, 부여 자온길, 공주 퍼즐랩, 강릉 더웨이브 컴퍼니, 거제 공유를위한창조, 남해 팜프라촌 등 전국 곳곳에서 공간 기획력과 콘텐츠 개발력으로 무장한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쇠락한 지역의 유휴공간이나 상권이 아니었던 주거지역을 젊은 이들이 살고 싶어 하는 도시로 탈바꿈한다.
로컬 크리에이터 중심의 크리에이터 타운 모델은 크리에이터가 직접 조성한 도시 인프라에 다른 크리에이터를 유치하는 모델이다. 정부가 해야 일은 세 가지다. 첫째, 크리에이터 타운 입지가 좋은 원도심의 재생을 지원해 건축, 보행, 문화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둘째, 일, 주거, 놀이 등 크리에이터에 필요한 도시 인프라를 건설하는 로컬 크리에이터를 지원해야 한다. 셋째, 과감한 기업과 개인 인센티브를 통해 새로운 크리에이터 타운에 다양한 유형의 크리에이터를 유치해야 한다. 크리에이터 타운은 이처럼 정부와 민간이 협력해 도시 환경 개선, 크리에이터 인프라 구축, 크리에이터 유치 사업을 통합적으로 추진해야 성공할 수 있는 모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