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클래스 2021년 06월호
골목길 경제학자 모종린 교수
2021년 06월
글 : 김민희 기자 / 사진 : 서경리 기자
한국의 ‘골목여지도’를 만든 학자, 국내 유일의 골목길 경제학자, 밀레니얼의 ‘핫’하고 ‘힙’한 공간을 구석구석 누빈 베이비부머 세대, 로컬 크리에이터들의 멘토….
모종린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그는 철저히 현장 학자다. 전국 곳곳을 직접 다니며 골목길 상권 지도를 완성했다. 그렇게 찾아낸 골목상권은 155곳에 이른다. 그가 말하는 골목상권이란 “사람과 돈이 모이는 브랜드”로, 서울 61곳, 광역시 36곳, 기초단체 58곳에 골고루 흩어져 있다. 서울의 경리단길, 익선동, 문래동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골목상권뿐 아니라, 경남 거제시 옥포 옥태원길, 창원시 용호동 가로수길, 전남 순천시 조곡동 역전길 등 다소 낯선 골목들도 꽤 있다. 이것만 놓고 보자면 대한민국은 서울만 비대한 대도시 중심 국가가 아닌, 전국 곳곳이 고르게 발전한 균형 국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모종린 교수가 꿈꾸는 미래다. 그는 “로컬에 오프라인의 미래가 있다”라고 본다. 더 나아가 그는 “로컬이 한국 경제를 견인할 것”이라고까지 단언한다. 그의 자신만만한 전망은 그저 한두 해 연구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무려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쉼 없는 현장 연구가 더해진 축적의 결과다.
그는 얼마 전 3부작 로컬 연구서의 완결판 격인 《머물고 싶은 동네가 뜬다》를 펴냈다. 1부 《골목길 자본론》(2017년)에서는 “골목이 돈이 된다”를 피력했다면, 2부 《인문학,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다》(2020년》에서는 라이프스타일의 역사로 본 과거와 현재, 미래 도시를 조망했다. 3부는 그보다 더 미시적으로 접근해 로컬 크리에이터를 위한 실용서의 성격을 띤다. 아울러 이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한 정책적 제언도 함께 담았다. 이 세 권이 다가 아니다. 이보다 먼저, 《작은 도시 큰 기업》(2014), 《라이프스타일 도시》(2016)를 냈다. 본격 로컬 연구의 이론적 토대가 된 책들이다.
전주 골목을 누비고 막 서울로 올라온 모종린 교수를 만났다. 한 주 안에 강릉·부산도 다녀왔고, 전주만 수십 번째라고 했다. 그는 “아무리 책을 읽어도 안 되는 게 있어요. 직접 가봐야 해요”라며 배낭을 내려놓았다. 족히 10kg은 돼 보이는 묵직한 배낭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골목길을 누비고 다닌 겁니까.
“틈만 나면 내려가요. 골목상권 155곳 중 한두 곳 빼고 다 다녀본 것 같아요. 같은 곳을 수십 번 가기도 했고요. 골목길 현상은 2005년부터 시작됐습니다. ‘강북으로 놀러 가자’라는 말이 흔해지고, 강북 상권도 어마어마하게 커지고 있는데 아무도 연구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걸어오신 길과 골목길은 어째 좀 어울리지 않아 보여요. 코넬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연세대에서 국제학대학원 교수로 계신데요.
어쩌다 골목길 연구에 빠지게 됐습니까.
“제 문제의식은 경제 쪽에서 출발해요. 우리나라는 기업의 생태계가 건강하지 않은 데다가 제조업 기반이라 신성장동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어요. 첫째는 주력 산업 위주의 성장동력.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기존 산업에 의존하는 신성장동력은 다 실패했거나 선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애플이나 구글 같은 스타트업을 양성하는 겁니다. 이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혁신창업 생태계를 만들고 있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아요. 서울 테헤란로, 경기도 판교, 대전 대덕 정도만 가능성이 있지, 나머지는 안 보이거든요. 또 스타트업계의 비즈니스 모델은 고용을 최소화하거나 하더라도 질이 낮은 고용 중심입니다. 셋째가 바로 제가 주목하는 부분입니다. 로컬 생태계로 불리는 지역 산업이에요.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국가 산업만 있었지, 지역 산업은 없었어요. 유럽을 보면 다양한 지역 산업이 국가 경제 성장의 추동체가 됩니다. 그런 면에서 지역 산업의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해요. 실제로 지역이 골목상권 중심으로 들썩거리고 있고요.”
게다가 밀레니얼의 출현이 골목상권의 성장을 견인했지요. 밀레니얼은 나다움을 추구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니까요.
“기성세대는 부르주아 문화예요. 이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이 문화적 토대 덕분에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산업사회의 부르주아 문화는 조직력, 성공, 노력 등을 강조하면서 모범생을 만드는 문화예요. 소득이 낮을 때는 부르주아의 질서를 수용했지만 더 이상은 통용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경제 성장을 이룬 후에는 자아실현 욕구가 강해져요. 밀레니얼은 일과 직업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고 싶어 해요. 회사 안에서도 자유로운 영혼이 되려 하고, 창업을 하더라도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구현할 수 있는 비즈니스를 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취향이 분명하고,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이 확고하죠. 그런 친구들이 모이기 시작한 게 2000년대 초 골목입니다. 가게 주인이지만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 예술가에 가까운 친구들이 많아요.”
로컬 크리에이터 세대인 2030 세대와 자주 어울리시는데요, 대화는 잘 통합니까?
“밀레니얼 단어 테스트하면 빵점 나와요(웃음). 제 역할은 양쪽을 이어주는 브리지 역할이에요. 이 친구들에게는 자신들의 활동이 통사적 차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게 해 주면서 지향점을 보여주고, 학계와 주류사회에는 이 친구들의 역할을 알려주는 거죠.”
도시를 떠나 로컬을 지향하는 청년들이 많아지고 있는데요, 왜 그런가요.
“밀어내는 요소인 푸시 팩터(push factor)와 끌어당기는 요소인 풀 팩터(pull factor)가 있어요. 첫 번째 푸시 팩터는 기성세대 문화에 대한 저항입니다. 서울, 강남이 기성세대 문화의 상징이니 여기를 떠나 로컬로 가는 거예요. 두 번째 푸시 팩터는 기회의 상실입니다. 예전에 비해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줄어들면서 도시로 상징되는 주류사회에서 로컬로 밀어내는 경향이 있어요. 풀 팩터는 지역에 기회가 있다는 관점입니다. 서울서 확보한 능력을 지역에 가서 펼치면 기회를 선점할 수 있다는 거죠. 또 지역이 과거에 비해 살기 좋아진 측면도 있습니다. 청년들의 지역 정착을 돕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지원사업도 있고요.”
언택트 시대에는 오히려 딥택트가 되어야 하고, 골목상권이 더욱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언택트 시대와 관계없이 시장 경제의 흐름은 크게 두 곳을 향해요. 하나는 편리성에 기반한 온라인 시장, 또 하나는 경험에 기반한 오프라인 상권. 이 오프라인 상권의 미래가 바로 골목상권입니다. 백화점도 안 돼요. 더현대, 스타필드 등 대형 상업시설에서 도시 문화를 표방하며 노력하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대형 쇼핑몰은 규격화되어 있어서 운영자가 개성을 표하는 데 한계가 있어요.”
로컬 콘텐츠와 라이프스타일 비즈니스는 어떻게 연결돼 있나요.
“고리는 나다움이에요. 제 바람은 나다움이 지역 다움을 만들고, 지역 다움이 나라 다움으로, 세계 다움으로 바뀌는 겁니다. 애플을 보세요. 스티브 잡스의 나다움이 결국 세계의 표준이 됐어요.”
누구는 나다움에서 머물지만, 또 누군가는 나라 다움, 세계 다움으로 나아갑니다. 그 차이가 뭘까요.
“창업가의 라이프스타일과 관계있다고 봅니다. 어떤 창업가는 나다움에서 머물고 절대 확장을 안 합니다. 작은 가게에서 먹고사는 데 만족하죠. 반면 스티브 잡스는 시선과 포부가 달랐어요. 나다움을 확장시켜 결국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냈죠.”
로컬 콘텐츠를 미래 산업으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로컬의 가치와 글로벌 가치를 동시에 가져가야 해요. 로컬 대 글로벌 비중이 30 대 70 정도가 적당하다고 봅니다. 로컬 정체성을 뿌리에 두되, 100% 로컬을 지향하면 위험해요.”
《머물고 싶은 동네가 뜬다》에서는 전체가 아닌 일부가 선호하는 콘텐츠를 추구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했는데요.
“아모레퍼시픽이 자연주의 화장품인 이니스프리를 론칭한 건 기업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리스크일 수 있어요. 다수가 아닌 일부 시장만을 겨냥한 거니까요. 하지만 일부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도 세계 시장 규모로 보면 글로벌 대기업을 배출할 수 있는 거대 시장입니다. 이니스프리는 선전하고 있어요. 그 이유 중 하나는 화장품 원료를 제주 식물에서 추출하고 제주 이니스프리 하우스를 만드는 등 제주를 통해 확보한 라이프스타일 진정성에 있다고 봅니다.”
왜 로컬이 오프라인의 미래인가요.
“인류의 성장과정에서 봤을 때 부르주아 문화까지는 획일적 라이프스타일이 통했지만, 저성장과 문화 경제 기조로 돌아서면서 다양성의 가치를 담은 로컬 문화가 환영받아요. 로컬을 지향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삶의 질입니다. 과거에는 서울이 삶의 질이 높았지만 지금은 반대로 보는 경향이 강해요. 과거엔 로컬이 억압적이어서 익명성을 추구하기 위해 서울로 왔지만 지금은 반대죠. 서울 중심 문화가 강하고 억압적이어서 오히려 로컬에서 더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경제력과 능력 대비 로컬에 기회가 있다는 거죠.”
강남 전성시대는 끝났다?
“골목상권이 많아지면서 다극 시대로 가고 있어요. 실제로 마용성(마포·용산·성동), 노도강(노원·도봉·강북)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도 골목상권의 부활과 관계있어요. 불과 20년 전만 해도 강북에서 희망을 찾기 어려웠잖아요. 강남과 강북의 격차가 오랫동안 사회문제였지만 그 격차가 슬슬 줄어들고 있다고 봅니다. 어디에서 사는지가 나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건 불행한 일이잖아요. 어디서 살든 원하는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나라가 좋은 나라예요. 그런 점에서 희망이 보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로컬 생태계의 발전 단계는 어디까지 와 있다고 보십니까.
“꽤 고도화됐지만, 아직 기회는 많아 보여요.”
딱 보면 아직 상권 형성은 안 됐지만 골목상권의 씨앗이 될 만한 곳이라는 느낌이 오나요?
“그런 편이죠.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동네에서 느껴지는 무게가 있어요. 역사의 무게랄까요. 그런 곳에 골목상권이 형성됩니다. 중심이 있어 보이면서 차분해요. 간판도 점잖고, 양반 동네 같고요.”
활기가 없어 차분한 동네와는 어떻게 다른가요.
“네온사인으로 반짝이지 않는데도 활기가 있어요. 만만치 않아 보이고요. 내가 뭘 잘못하면 동네 어른이 다가와서 혼낼 것 같은 분위기(웃음)? 일단 길이 잘 정비돼 있어야 해요. 원도심 지역으로 1970년대 부자동네였던 삼청동·가회동·연희동·서교동이 그 경우죠. 외곽 지역은 90년대 이후 연립주택으로 바뀌면서 골목상권이 들어설 수 있는 구조를 상실했어요.”
도시건축의 역사에서 볼 때 골목상권의 부활은 긍정적인 흐름이군요. 시간의 가치와 역사의 흔적을 기억하는 양식이니까요. 기술 중심의 미래에서 사람 중심의 미래로 향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우리가 취향을 다변화하지 않고는 자본주의를 구할 수 없어요. 여기저기에서 시도되는 로컬을 응원해줘야 해요. 로컬이 명품이다, 로컬이 가치 있다는 것을 알아줘야 합니다. 선진국일수록 고유의 것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요. 우리도 한 단계 나아가려면 다양성을 지키려 노력해야 합니다. 전부 경쟁 논리, 가성비 논리, 취향의 서열화로 간다면 슈퍼스타만 살아남아요. 도시도, 예술가도. 기업도. 그리 되면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는 희망적으로 봅니다. 인간은 편리성뿐 아니라 색다른 경험을 원하는 본능도 있잖아요. 로컬 상권의 부활이 인류의 행복을 위한 방향성과 맞닿아 있다는 걸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출처: 톱클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