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가 공개적으로 말은 안 하지만 지역발전을 포기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선거 때마다 남발되는 공약은 말 그대로 선거용 공약(空約)이다. 진정으로 지역발전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한국 사회는 지역발전에 대한 지적 자신감을 상실했다.
지역발전을 지적으로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역발전 담론의 수준이다. 지방소멸과 수도권 집중 집착, 대기업과 첨단산업 중심주의, 재정 지원과 규제 특혜 중심의 재분배주의 등 현재 논의되는 지역발전의 대안을 보면, 한국 사회가 지역발전 부진의 원인과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현재 지역발전 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남 탓’이다. 원인을 그렇게 분석하니 대안도 뻔하다. 지역은 일관되게 그 ‘남’의 지원을 요구한다. 지원 방법도 지역이 과연 자존감이 남아있나 의심할 정도로 물질적 지원 일변도다.
개도국도 선진국에 물고기보다는 물고기 잡은 방법을 전수해달라고 요구하는 판에 한국의 지역은 왜 물질적 지원만 요구하는 것일까? 현실적인 이유에서 재정 지원이 필요한 것은 알겠지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다른 지역에 동일한 기회를 주면 특혜 효과가 상쇄되는 규제 특혜를 유독 선호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과연 지역이 돈이 부족하고 규제가 많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나갈 수 없는 것일까?
이제 지역발전 논의는 상식의 수준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지역에 가장 필요한 격언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다. 작은 것이라도 독립적으로 성공시킨 사례를 모으고 알려야 한다. 그 작은 것 중에 하나가 국가적으로 중요한 기업이나 시설로 성장할 때 비로소 지역은 자생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역 스스로 일어나려는 독립정신과 자립정신을 키우지 않는 한 모든 지역발전 구호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독립정신의 중요성은 다른 곳에 찾을 필요가 없다. 한국 발전의 원동력 자체가 독립정신이었다. 1960년대 한국은 수출 주도 성장이라는 독립적인 발전 전략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 수출 주도 성장을 실현할 수 있을 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과 지적 자신감이 있었다.
이런 지적 독립정신은 1962년 수립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그대로 담겨 있다. 한국 경제 설계자들은 1차 5개년 계획의 목표를 자립경제 달성을 위한 기반 구축으로 설명했다.
학계가 한국 모델을 수출, 그리고 수출 산업 육성을 위한 외자 도입으로 설명하다 보니 많은 사람이 한국 모델이 외부 의존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출은 수단이었고 외부 자원도 독립적인 경제 발전 설루션을 바탕으로 유치했다. 외부가 한국의 계획을 믿고 지원한 것이다. 누가 아무런 자생 계획 없는 나라를 지원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당시 한국 정부가 유치한 외부 자원의 성격이다. 한국 정부가 원한 것은 투자가 아닌 차관이었다. 차관이 외국인 투자보다 경영 자율성을 유지하는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외국인 투자 기업으로는 국가 우선순위 중심의 산업 정책을 추진하기 어렵다. 한국 정부에게 장기 성장 기반이 중요하다면, 외국인 투자 기업에게는 단기 투자 회수가 중요하다.
차관이 유리한 더 중요한 이유는 외국인 투자 기업의 본국 중심 주의다. 한국 기업도 마찬가지지만, 외국 기업이 핵심 기술과 인재를 타국에 이전할 가능성은 낮다. 설사 외국인 인재가 한국에 와도 한국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지역도 한국이 그랬듯이 내부 기업(지역에 본사를 둔 기업) 중심으로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
정리하면, 1960년대 한국 사회는 자체적으로 경제 발전 설루션을 찾았고, 이의 타당성을 외국 정부와 원조 기관에 설득해 필요한 외부 자원과 이를 자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비록 자원 확보 수단으로 외부 자원과 시장에 의존했지만 설루션 도출과 추진 체계는 독립적이었다.
과연 한국 지역의 지역발전 전략이 1960년대 한국의 발전 전략의 교훈을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중앙 정부의 재정 지원과 규제 특혜를 요구하기 전에 이를 통해 무엇을 실현하려고 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단어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독립적인 발전 전략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외부 기업 의존도 틀렸다. 한국이 외국인 기업을 믿을 수 없었다면, 지역도 서울에 본사를 둔 대기업을 믿으면 안 된다. 지역에 필요한 기업은 지역에 본사를 둔 기업이다. 외부 자원을 빌려올 망정 지역의 자생 능력은 포기하면 안 된다.
독립발전을 위해 지역의 할 일은 명확하다. 한편으로는 외부 의존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생적 창조와 혁신 능력 강화 중심으로 지역발전 전략을 정비해야 한다.
지역 사회가 거부해야 하는 외부 의존적 담론의 대표적인 사례가 지방소멸과 균형발전이다. 지역이 어렵다면 위기를 자신 있게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내보내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지역 정부가 적극적으로 소멸론을 홍보한다. 내심 반기는 분위기까지 감지된다. 소멸론을 중앙의 지원을 더 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서일까?
재분배 호소용 소멸론은 재고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소멸론 호소에 외부인은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해보자. 과연 위기에 빠진 지역을 돕고 싶을까? 심정적으로는 동정하겠지만 행동으로 옮길 가능성은 낮다. 인간의 본능은 승자에 베팅하는 것이다.
소멸론 홍보를 자제해야 하는 보다 중요한 이유는 주민 사기다. 지역에서 뭔가를 하려고 노력하는 청년에게 소멸론은 어떤 메시를 던지는가? 지역 정부는 '순진하게' 소멸론을 접한 지역 청년이 지역 사랑을 더 발휘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일까? 지역 청년도 외부인과 마찬가지다. 침몰하는 배를 탈출하고 싶어 한다.
균형발전 담론도 지역에 필요한 독립정신을 훼손한다. 균형발전이 국가가 추구해야 할 가치임에는 틀림없지만, 균형발전을 지역 간 재분배로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자생적 발전에 필요한 산업과 인구 기반을 보유한 부산, 대구, 광주 등 지역 대도시까지 균형발전 논리에 편승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지역 대도시에 필요한 것은 독립적 발전 전략, 설루션 도출 능력이다. 지역 지도자들의 마인드 세트만 바꾸면 쉽게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지역발전 정책도 독립적 설루션 도출 능력 강화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 지역발전 정책은 자원 동원 방법에 따라 외부 자원과 내부 자원, 경쟁력 확보 방법에 따라 수요 창출과 공급 혁신으로 분류할 수 있다.
현재 지방정부가 선호하는 정책은 대기업 유치, 첨단 산업 유치, 지원을 통한 외부 시장 확보 등 대부분 외부 자원과 능력에 의존하는 정책이다.
내부 역량 강화 정책도 지역 혁신 생태계 구축에 편중되어 있다. 지역 대학, 연구기관, 대기업을 연결하는 지역 혁신 생태계 정책은 그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국가산업단지 관리 수준에 머물고 있다.
지역이 진정으로 지역 혁신 시스템을 원한다면 시스템을 견인하는 지역 대학부터 개혁해야 한다. 스스로를 지역이 아닌 전국 대학으로 정의하는 대학으로는 지역을 위한 지역 혁신 시스템을 구축하기 어렵다.
문화창조시대에 걸맞은 지역의 자생적 창조 능력 강화 정책은 아직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못하고 있다. 지역 주민이 스스로가 설루션을 찾고 이를 사업화하는 지역순환경제를 원한다면 지역 자원을 활용해 지역 문제를 해결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는 로컬 크리에이터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주민이 자발적으로 지역 기업과 산업을 지원하는 로컬 소비문화도 권장해야 한다. 지역 소비를 증진하는 지역화폐 제도도 중단하는 것보다는 보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진정한 의미의 로컬 소비 운동은 주민이 지역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다. 외부인이 지역화폐를 사용하는 것은 진정한 로컬 소비로 보기 어렵다.
1960년대 이후 국가 자원을 동원해 지원한 중앙 산업으로 성장한 한국이 중앙 중심에서 지역 중심 지역발전으로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변화의 시작은 담론이다. 지역 지식인과 활동가가 앞장서 왜곡된 지역발전 담론을 정상화해야 한다. 중앙정부의 지역 정책이 중앙 중심에서 지역 중심으로 변하길 원한다면, 지역사회가 먼저 중앙 중심에서 지역 중심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그리고 지역사회가 지역 중심 사고로 선택해야 할 지역발전 모델은 독립발전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지역을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