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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경제학자 Feb 14. 2023

중세 크리에이터主義

크리에이터 경제는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크리에이터에서 크리에이터 경제로, 크리에이터 경제에서 크리에이터주의로 진화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크리에이터 문화의 확장 경로다.


크리에이터주의, 뭔가에 ‘주의(主義)’ 단어를 붙이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의 이념이나 이론 체계로 완성해 그것의 지속성이나 주도성을 구현하겠다는 의미다. 현재 부상하고 있는 크리에이터 경제가 지속가능해지려면, 이를 지원하는 '크리에이터주의' 이념을 이론화하고 역사적인 기원을 찾아야 한다.


산업혁명 이후 크리에이터 경제를 기존 경제 체제의 대안으로 인식한 최초의 지식인은 19세기 미술공예운동을 주도한 윌리엄 모리스다. 그는 산업주의과 기계문명에 의해 훼손된 노동의 인간성과 일상에서 쓰이는 상품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중세 수공업자와 장인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노동 문화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대적 의미의 크리에이터주의를 처음으로 정립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지적 호기심이 발동한다. 산업혁명 전에는 크리에이터주의를 주장한 지식인은 없을까? 고대나 중세에서 크리에이터주의 사상가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개인주의 사상을 전제로 한 크리에이터주의는 개인의 일을 소명으로 설파한 개신교가 등장한 종교개혁 이후에나 가능한 개념이다.


종교개혁과 산업혁명 사이에서 활동한 사상가가 윌리엄 모리스 같이 수공업 장인을 기계나 대기업의 대안으로 인식할 가능성은 낮다. 대자본 기반의 기계 문명이 시작되기 전이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터를 자신이 손수 제작한 것을 시장에서 파는 사람으로 정의하면 그가 기계와 경쟁하는지 안 하는지 여부는 크리에이터 정체성에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크리에이터 개념을 산업혁명 전의 장인에게 적용할 수 있다.  


크리에이터주의 사상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문헌의 하나가 유토피아 소설이다. 16세기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발표한 이후 서구 지식인은 유토피아 소설 형식을 빌어 자유롭게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향을 구상했다. 서구 16-19세기 유토피아 문헌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 톰마소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1602), 발렌틴 안드레(아)의 '기독교도시(Christianopolis, 크리스티아노폴리스)’(1618), 프란시스 베이콘의 ‘뉴 아틀란티스’(1626), 샤를 푸리에의 ‘사랑의 신세계’(1817), 에드워드 벨라미의 ‘뒤를 돌아보며’(1888), 윌리엄 모리스의 ‘에코토피아 뉴스’(1891)로 이어진다.


전반적인 추세는 17세기 농업 기반 유토피아에서 19세기 사회주의 기반 유토피아로의 이동이다. 17세기 유토피아가 농업 중심의 기독교 공동체를 꿈꾸었다면, 19세기 유토피아는 대량 생산 산업 체제의 대안을 사회주의에서 찾았다. 이 흐름에서 예외적인 사상가가 17세기 초반 ‘장인 공동체’ 기반의 기독교 유토피아를 제안한 발렌틴 안드레다.


안드레가 유토피아로 제시한 기독교도시는 인구 400명의 장인 공화국(Artisan Democracy)이다. 모든 시민이 성안 공동체에서 (노동자와 농부가 아닌) 장인으로 일하며 산다. 안드레가 장인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는 일반적으로 장인을 표현하는 크래프트맨(Craftsmen) 외에도 기술자(Mechanics), 아르티장(Artisans)이다. 도시 구조는 중세 수도원을 연상시키는 폐쇄된 성곽 도시다. 기독교도시 제목이 암시하듯이 주민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기독교도시가 17세기 다른 유토피아와 가장 큰 차이점은 경제 기반이다. 다른 유토피아의 주민은 농부라면, 기독교도시 주민은 농업을 포함한 다양한 산업에 종사하는 장인이다. 기독교 도시산업은 크게 농업과 축산업, 식료품점과 경공업, ‘중공업’(금속, 유리, 도자기)으로 나뉜다.


기도교도시에서 농업이 존재하지만 경제 활동의 중심은 아니다. 안드레는 성밖에 토지를 농지와 목장으로 이용한다고 언급하지만, 농축업 활동이나 기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에게 농축업은 유토피아 경제에서 한계 분야이다.


안드레는 오히려 농업보다는 제분, 제빵, 정육, 고기 가공 등 식가공 산업을 강조한다. 기독교도시는 또한 가구, 장식, 소품, 도구 등 소비재 수공업뿐 아니라 금속, 유리, 도자기 공예 등 대형 열설비가 필요한 (당시 기준의) 중공업이 활발하다. 모든 상품은 도시 안의 중세 공방 형태의 공장에서 만들어진다.


과연 안드레를 현대적 의미의 크리에이터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을까? 필자는 크리에이터주의자의 기본 가치를 크리에이터 경제의 소명성, 일상성, 대중성, 중심성으로 규정한다. 크리에이터주의 관점에서 크리에이티 경제가 만족해야 할 조건이기도 하다.


첫째, 크리에이터주의자는 소명 또는 자아실현 노동을 믿는다. 종교개혁에 참여한 안드레도 장인의 일을 개신교적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기독교도시의 장인은 물질적 보상을 받는 것보다는 신을 기쁘게 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일을 한다. 기독교도시는 노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장인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발휘한다.


현대 크리에이터는 종교적 소명의식보다는 자아를 실현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서 일의 의미를 찾는다. 소명의식과 자아실현은 둘 다 자율적인 노동을 의미하는 측면에서 크리에이터 경제의 소명성 가치에 부합한다.


둘째, 크리에이터주의자는 크리에이터 경제의 일상성을 지지한다. 예술인뿐만 아니라 공예인, 상인, 그리고 일반 시민 등 일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모든 사람을 크리에이터로 인정하다. 크리에이터가 일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도시가 바로 안드레의 기독교도시다. 도시 전체가 공방(Workshop)이라고 불릴 만큼 크리에이터 경제의 일상성을 실천한다.


셋째, 크리에이터주의자는 다수가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는 경제를 지지한다. 안드레의 기독교도시에서는 다수가 아닌 모든 사람이 크리에이터로 활동한다. 크리에이터 경제의 대중성을 완벽하게 만족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쉽게 장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도시는 체계적인 인문 교육을 통해 시민이 자신에게 맞는 크리에이터 분야를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기독교도시의 장인은 고도의 교육을 받은 학자 수준의 전문가다.


넷째, 크리에이터주의자는 크리에이터가 미래 경제의 중심축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크리에이터가 주도하는 경제의 대표적인 모델이 장인 중심으로 작동하는 안드레의 기독교도시다. 아직 산업혁명이 시작하지 않았은 시대에 산 안드레가 장인 중심 체제가 아닌 다른 경제 체제를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안드레가 당시 존재한 수공업 경제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다. 그의 기독교도시 경제는 단순한 생산 경제가 아닌 창의성과 다양성을 중시하는 크리에이터 경제였다. 동시대 다른 지식인보다 먼저 크리에이터 경제가 창출하는 문화 다양성, 노동 창의성의 중요성을 이해한 것이다.


아쉽게도 크리에이터 경제의 개념을 정립한 안드레는 서구에서도 널리 읽히는 작가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번역도 안된 무명작가다. 안드레를 동시대 최고의 유토피아 작가로 평가한 사람은 20세기 초반 활동한 미국 사회비평가 루이스 멈퍼드다.  


안드레의 기독교도시는 현대 크리에이터 경제에도 적지 않은 교훈을 던진다. 현재 크리에이터 경제가 급속히 성장한다고 해도, 아직 기독교도시 크리에이터 경제의 소명성, 일상성, 대중성, 중심성 기준을 따라가기에는 상당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또 한편으로는 안드레 사상의 급진성도 엿볼 수 있다. 그가 꿈꾼 세상은 플랫폼, SNS 등 현대가 이룬 과학과 기술 발전 없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회다. 미래 경제가 기독교도시의 크리에이터 경제가 제시한 방향으로 발전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실현 가능해지려면 앞으로 더 많은 기술 발전과 사회 혁신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루이스 멈퍼드, 유토피아 이야기, 박홍규 역, 2010.

Valentin Andreae, Christianopolis, 1618/2007

Lewis Mumford, The Story of Utopias,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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