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면 소재지에 자원 집적한 마을
지역소멸 대응할 ‘공간 재생’ 사례
일반 로컬콘텐츠에 농업 융합하고
청년 크리에이터·브랜드 육성해야
정부 차원 건축디자인 지원 필요
지역소멸 대응의 핵심은 농촌 공간 재생이다. 지역의 대도시는 거점 도시로서 현재 수준의 인구와 활력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소도시도 원도심 자원을 잘 살리면 쇠락을 막을 수 있다.
문제는 농촌마을이다. 오랫동안 대안으로 제시된 식가공·재배지 관광 중심의 6차 산업은 부진하다. 식가공은 브랜드 파워가, 재배지는 경관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농촌 작물의 특성상 대규모 투자를 해도 재배지를 서구 와이너리(포도주 양조장) 같은 장소로 만들기 어렵다.
대안은 농촌 읍·면 소재지에 자원을 집적한 ‘로컬콘텐츠타운’ 육성이다. 새로운 개념의 농촌마을을 조성해 농촌이 청년 크리에이터와 지역 브랜드를 지속적으로 양성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농촌에 필요한 인적자원은 농산물을 재배하는 생산자에 한정되지 않는다. ▲캠핑·명상·아웃도어(야외활동)·펜션 콘텐츠를 제작하는 농촌생활 크리에이터 ▲독립서점·빵집·카페·게스트하우스(여행자숙소)를 운영하는 로컬 창업자 ▲농업·농촌 관련 온라인 콘텐츠를 공급하는 콘텐츠 창작자 ▲농업·농촌 굿즈(기념상품)와 서비스를 온라인에서 파는 온라인 판매자가 진입해야 로컬콘텐츠타운을 조성할 수 있다.
로컬콘텐츠타운이 기존 농어촌 상권과 다른 점은 콘텐츠다. 보편적인 로컬콘텐츠에 농업과 농촌 콘텐츠를 자연스럽게 더한 융합 콘텐츠로서의 차별성이다.
농촌마을, 특히 읍·면 소재지는 독립서점·빵집·카페·게스트하우스 등 생활편의시설을 갖추고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로컬콘텐츠타운으로 전환해야 한다. 또한 도시처럼 농촌의 로컬콘텐츠타운도 지역 상권이 견인해야 활성화가 가능하다. 농산물 콘텐츠의 다양화와 고도화도 요구된다. 원물의 신선도로 경쟁하는 현재 방식으로는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 특산물을 재배지역 읍·면 소재지에서 콘텐츠로 만들어 브랜드 파워를 키워야 한다.
로컬콘텐츠타운의 기본 조건도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건축자원, 보행환경, 문화시설, 크리에이터 커뮤니티 등 4가지 조건이 매력적인 상권을 만든다. 농촌마을에서 가장 부족한 자원이 건축물과 가로(街路)다. 개성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건축물과 걷기 좋은 보행로가 콘텐츠를 생산하는 상권의 기본 조건이다. 읍·면 소재지 콘텐츠 상권도 적절한 수준의 건축자원과 보행환경을 보유해야 한다.
문화자원도 중요한 성공 조건이다. 상권이 자체적으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지만, 자연·문화재·문화시설 등 문화자원과 연결되면 생산이 용이해진다. 자연과 농업을 활용할 수 있는 농촌이 건축물과 인공적인 문화시설에만 의존하는 도시보다 풍부한 문화자원을 갖고 있다.
건축·보행·문화자원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이를 활용해 로컬콘텐츠를 생산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특히 농촌 콘텐츠를 공간 비즈니스로 구현하는 로컬 크리에이터의 역할이 중요하다. 농촌도 도시와 마찬가지로 로컬 크리에이터를 양성하고 커뮤니티를 지원해야 한다.
로컬콘텐츠타운이 과연 농촌지역에서 가능할까? 도시만큼 큰 규모의 상권은 어렵지만 20∼30개의 공간이 모인 작은 상권은 가능하다. 강원 양양군 현남면 죽도해변, 충북 충주시 노은면 신효리, 충남 홍성군 홍동면 갓골마을,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 제주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종달리,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등 많은 농촌마을이 골목상권 업종을 보유한 작은 상권으로 관광객을 유치한다.
물론 모든 읍·면 소재지가 로컬콘텐츠타운 사업으로 성공하기는 어렵다. 마을형·단지형 로컬콘텐츠타운을 다수 배출한 일본 사례는 디자인·장인정신 등 크게 두 가지 성공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 건축디자인의 힘이다. 로컬콘텐츠타운으로 거듭난 농촌은 주택과 상가 건축물이 상대적으로 우수하다. 농촌에 위치한 상점이지만 포장·포스터·인테리어·건축 등 도시 못지않은 디자인 실력을 보여준다.
특히 창업자의 디자인싱킹(디자인 사고방식을 활용한 창의적인 전략과 해결법)이 중요하다. 일본 도쿠시마현에 위치한 인구 1000명의 작은 마을 기토를 기반으로 지역재생 기업을 키운 ‘기토디자인홀딩스’가 대표적이다. 이 기업은 지역특산품인 유자의 생산과 가공, 게스트하우스·편의점·캠핑장·디저트공방 등 다양한 아이템으로 마을을 디자인했다.
둘째, 장인정신이다. 일본의 로컬콘텐츠타운은 공통적으로 한 명의 크리에이터, 하나의 마을, 하나의 콘텐츠, 한평생을 핵심으로 한다. 한 명의 크리에이터가 한 마을에서 한 콘텐츠를 한평생 가꾸는 것이다. 한 사람만 참여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의 앵커기업(선도기업)이 로컬콘텐츠타운을 주도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추진 과정에서 대규모로 확충해야 할 자원은 건축과 크리에이터다. 농촌 공간 재생이 도시 재생보다 어려운 이유는 크리에이터를 유인하는 건축 자원의 부재 때문이다. 정부가 농촌 공간을 정비해 콘텐츠로 만들 수 있는 건축물과 가로를 공급하지 않으면서 크리에이터가 진입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현재 정책 현장에서 논의되는 대안은 건축디자인 지원이다. 정부가 동네 건축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따라 주택과 상가를 개·보수한 건축주에게 건축설계비를 지원하는 것이다.
농촌 크리에이터 공급에도 혁신이 필요하다. 막연하게 지역 대학과 학교가 크리에이터를 육성할 것으로 기대하지 말고, 로컬콘텐츠타운 예정지에 로컬콘텐츠 사업화 기술을 교육하는 메이커 스페이스(열린 제작실)를 운영해야 한다. 모든 제작분야를 지원하기 어렵기 때문에 크리에이터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디자인·인테리어 공사 기기, 지역특산물을 가공하는 기자재 중심으로 공간을 구성해야 한다.
한국 농촌 상황이 어렵지만, 한편으로는 한 번도 제대로 활용한 적이 없는 지역 자원을 갖고 있기도 하다. 현재 중요한 것은 사고의 전환이다. 농촌에도 크리에이터를 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따지고 보면 지역재생 성공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제주, 강원 양양도 로컬콘텐츠타운으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곳은 각각 예술·서핑과 결합된 로컬콘텐츠로 청년이 살고 싶어 하는 로컬콘텐츠타운을 조성했다.
농촌에서 로컬콘텐츠타운을 확대하려면, 1970년대 새마을운동 같은 범사회적인 커뮤니티 운동을 가동해야 할지 모른다. 현재 진행되는 다양한 사업을 하나의 추진 체계로 통합해 지역에 분산된 에너지를 결집해야 한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농가 소득을 높이고 농촌 마을 거주 환경을 개선했다면, 2020년대 새마을운동은 농촌 크리에이터 소득을 높이고 농촌 콘텐츠 생산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제1의 새마을운동이 공급한 농촌 자원이 지도자, 시멘트, 철근이라면, 제2의 새마을운동이 공급해야 하는 농촌 자원은 크리에이터, 콘텐츠, 디자인이다. 새마을운동의 기본 정신도 근면, 자조, 협동에서 창조, 자립, 협업으로 바꿔야 한다. 민간에서 시작된 로컬콘텐츠타운 실험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후세에 제2의 새마을운동으로 기억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