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다운타운? 1980년대 중반 LA에서 대학원을 다녔던 나에게 LA 다운타운은 오피스 타워였다. 벌판에서 불쑥 튀어나온 오피스 타워 외에는 딱히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지난주 다운타운 LA(Downtown Los Angeles, DTLA)를 찾은 이유는 에이스호텔(Ace Hotel) 때문이다. 에이스호텔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어바인, 산타모니카, 베니스비치 등 다른 지역을 둘러볼 계획이었다. 호텔이 위치한 다운타운에는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LA 도시 문화 자체에 큰 기대를 갖지 않았다. LA의 대중적 이미지는 '도시 없는 도시'다. 자동차, 고속도로, 단독주택 등 LA 도시 문화의 3대 아이콘이 상징하듯이 LA는 중심 없이 폐쇄적인 작은 도시들이 분리되어 끊임없이 이어진 메가폴리스다. 개인 이동성(Individual Mobility), 개인 공간(Private Space), 개인 기회(Individual Opportunity)를 통해 LA가 중시하는 가치인 자유, 관용, 개방성을 실현하지만, 도시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거리 문화와 커뮤니티 문화는 의도적으로 포기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 레이너 밴햄(Reyner Banham) 이후 수많은 작가가 LA의 뭔가에서 장소성, 정체성, 도시성 등 도시의 영혼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LA의 의미를 바꾸지는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LA는 부정적인 의미의 자동차 도시다.
이런 환경에서도 에이스호텔은 로컬 연구자에게 특별한 장소다. 자타가 공인하는 로컬과 도시재생 산업의 대표 선수다. 1999년 시애틀에서 창업한 후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로컬 커뮤니티 호텔 모델로 낙후 지역을 재생했다.
LA에는 2014년에 진출했다. 도시재생 호텔답게 쇠락한 사우스 브로드웨이(South Broadway) 거리의 역사적인 건축물을 선택했다. 유나이티드 아티스트(United Artists) 영화사 본사로 1927년 건축된 건물로 내부에 극장이 있었다. 건물 입구에 극장 간판을 남겨놓은 이유다. 1990년대에는 한 목사가 이 건물을 교회와 기독교방송국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건물 뒤 '예수가 구원한다(Jesus Saves)’ 사인이 남아있다.
에이스호텔 진출 당시 기사를 보면 이 호텔의 파워를 실감하게 만든다. LA 같은 글로벌 도시가 작은 호텔의 진입을 마치 구세주가 온 듯 환영했다. 에이스호텔 효과인지 그 후 사우스 브로드웨이 지역에 스타벅스, 셰이크 쉑, 프래핸드 등 다른 유명 브랜드가 들어왔다.
에이스호텔의 역사를 읽고 주변을 걸으면서 DTLA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이 지역이 도시재생 역사에서 중요한 지역인 것을 깨달았다. 다운타운이 LA 경제에 중요한 것은 명확하다. 1980년 톰 브래들리(Tom Bradley) 시장이 강조한 것처럼, 아무리 LA가 스프롤(Sprawl) 도시라도 대기업과 금융기관이 모인 다운타운은 필요하다. 그래서 1960년대 이후 다운타운을 살리려고 무단히 노력했고, 현재도 2028년 하계 올림픽 개최를 준비하기 위해 대규모 자금을 투자한다.
도시재생 관점에서 중요한 이유는 다운타운이 자동차 도시 재생 사례기 때문이다. 다른 도시와 달리 LA의 다운타운은 중로나 골목길 없이 대로로 연결된 격자형 구조망과 작은 건물이 아닌 대형 건축물이 즐비한 ‘대형 건축, 대형 도로 자동차 도시’다. 지적으로 궁금해졌다. 과연 자동차 도시 DTLA에서 LA 정체성에 어울리지 않는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을 살릴 수 있을까?
DTLA의 전성시대는 1920년대였다. ‘광란의 20년대 (the Roaring 20s)’라고 불릴 만큼 미국 자본주의의 최고 번성기였다. 그 후 LA의 수평적 확장(Sprawl)이 시작되면서 다운타운은 중심지 기능을 상실했다. 인종분규로 거주 환경이 악화된 1960년대에 들어서면 다운타운은 ‘버려졌다고’ 표현할 만큼 공동화됐다. 치안과 경제적인 이유에서 다운타운의 쇠락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던 시 정부는 다양한 재개발과 재생 사업을 추진했다. 다운타운 재생 역사는 크게 3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
철거와 퇴거 단계(1960~1970년대): 1960년대 벙커힐(Bunker Hill) 지역을 시작으로 저층 거주 지역을 철거하고 대형 오피스 빌딩, 고급 아파트, 대형 문화시설을 건설하는 것이 특징이다.
지역사회 개발 단계(1970~1990년대): 1973-1993년 재임한 브래들리 시장은 벙커힐 지역 재개발과 더불어 재개발 프로젝트의 계획과 실행에 지역 주민을 참여시킬 필요성과 저렴한 주택과 사회 서비스를 강조하는 지역 사회 개발 모델을 추진했다.
도시재생 단계(1990년대~현재): 이 단계에서는 도시에 새로운 사업과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대형 개발과 대중교통 사업뿐만 아니라 문화와 리테일 중심의 장소마케팅과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했다. 2014년 에이스호텔 유치도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이었다.
도시재생은 2000년대 후반 시작된 도시 리브랜딩 중심으로 진행됐다. 다운타운 전체를 DTLA 브랜드로 통합하고, 역사중심(Historic Core), 시빅 센터(Civic Center), 패션지구(Fashion District), 보석지구(Jewelry District), 리틀 도쿄(Little Tokyo) 등 다운타운의 9개 소지역을 독립적인 문화지구로 브랜딩 하고 각 소지역 상권을 관리할 상권관리기구(Business Improvement District)를 설립했다.
DTLA 캠페인의 목표는 LA 다운타운을 활기차고 일하기 좋고 방문하기 좋은 곳으로 리브랜딩 하는 것이다. 이 캠페인은 인쇄 광고, 전광판, 버스 쉘터, 소셜 미디어 등 다양한 채널을 활용하여 타깃 고객에게 도달한다. 이 캠페인에는 DTLA 레스토랑 위크와 DTLA 아트 워크와 같은 다양한 이벤트와 이니셔티브도 포함되어 있다.
궁극적인 목표는 다운타운 지역을 직주락 센터, 즉 다운타운 안에서 일하고 살고 즐길 수 있는 지역을 만드는 것이다. LA시는 직주락 센터 목표를 '오피스-주거-예술&문화-리테일(Office-Residential-Art&Culture-Retail)'이라는 문구로 간략하게 표현한다. 직주락 센터의 주체를 기업, 주민, 예술인, 소상공인으로 설정한다.
1960년대 이후 추진한 재개발과 재생 사업은 2010년대 중반 구체적인 성과로 나타난다. 많은 기업과 브랜드를 다운타운에 유치하고 다운타운을 뉴욕과 같이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을 선호하는 사람이 살고 싶어 하는 지역으로 만들었다. 2019년 뉴욕타임스가 지적한 대로 DTLA는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벙커힐 지역 재생을 미술관, 공연장, 공원 등 대형 문화시설이 주도했다면, 사우스 브로드웨이 지역은 20세기 초 건설된 대형 아트 데코, 보 아츠(Beaux Arts) 건축물에 애플스토어, 어반아웃피터스, 반스, 에이스호텔, 폴스미스, 이솝 등 청년 세대가 열광하는 브랜드를 유치하는 방식으로 재생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다운타운 LA는 2020년부터 코로나19 팬데믹, 원격 근무의 증가, 범죄 증가, 저렴한 주택 부족 등의 요인으로 다시 쇠락하기 시작했다. 특히, 재택근무의 확대로 30% 수준으로 오른 다운타운 오피스 공실율이 다운타운 경제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2020년 이후 급격히 쇠퇴한 다운타운 LA(DTLA)가 다시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몇 가지 긍정적인 사인은 감지할 수 있다. 관광객과 비즈니스 여행객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일부 비즈니스는 재개장하거나 확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시 당국은 2028년 올림픽을 대비해 새로운 주택, 공원, 교통 인프라를 건설할 계획으로 이 지역에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DTLA가 지향하는 직주락센터 비전을 실현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많은 전문가가 불평등, 주택가격, 인종차별, 안전 등 사회경제적 요인을 지적하지만, 나는 건축 환경을 주목한다. 다운타운의 도시 구조 자체가 직주락 라이프를 어렵게 만든다.
고층 대형 건물, 대형 도로 중심의 DTLA는 중산층, 소상공인, 예술가가 진입해 창의적인 커뮤니티와 비즈니스 활동을 하기에 어려운 환경이다. 복수 용도, 쇼트 소블록, 다양한 연령대의 건축물, 주민과 상업 밀도 등 제인 제이콥스의 4대 조건을 만족하는 원도심의 거리가 활기 차고 창의적인 비즈니스를 잉태한다.
건축적 제약의 가장 큰 폐해는 소상공인 상권의 부재다. 전 세계적으로 문화를 창출하는 독립 소상공인은 골목길 같이 제인 제이콥스 조건을 만족하는 원도심 저층 지역에 자리한다. 시 당국은 골목 지역의 부재를 보완하기 위해 그랜드 센트럴 마켓 (Grand Central Market), 브로드웨이 아케이드 (Broadway Arcade) 등 대형 건물의 일층을 아케이드로 개조해 대형 푸드 코트 공간을 마련했다. 하지만 인위적인 아케이드로는 소상공인 지역의 분위기, 활력, 창의성을 재현하기에 역부족이다.
동네와 주민 문화의 부재도 건축 환경의 결과다. DTLA는 동네를 구분할 수 있는 지리적, 역사적 경계가 모호하다. 시정부가 9개 소지역을 문화 지구로 지정했지만, 이들 지역의 문화는 이 지역에서 실재 거주하는 주민이 만드는 문화가 아니다. 주민 문화 창출 지역에 제일 가까운 리틀 도쿄도 일본 테마의 상권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더 이상 일본계 미국인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니다.
DTLA 재생의 역사는 자동차 도시 재생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자동차 도시도 도시 마케팅, 대중교통, 문화시설, 주상복합, 보행환경 개선으로 지역 정체성에 기반한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과 상권을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동차 도시의 건축적 제약 때문에 주민 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도시 문화를 창출하고 선도하는 ‘위대한’ 도시로 성장하기는 어렵다는 한계가 드러난다.
문제는 한국이다. 무슨 생각으로 원도심을 방치한 채 문화 재생이 어려운 자동차 신도시를 계속 건설하는 걸까? 더 늦기 전에 도시정책을 이원화해야 한다. 원도심에서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건축 환경을 보유한 지역은 문화지구와 기업 생태계로 보호하고, 판교와 같이 국가 차원에서 경제 중심지로 육성하는 한 두 개의 신도시를 제외한 일반 신도시는 안정된 주거 환경을 제공하는 편의 시설 중심으로 개발하고 것이 원도심과 신도시가 균형을 이루고 상호 보완하는 도시 정책이다.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원도심을 도시 경제의 중심축으로 복원해야 한다.
[참고문헌]
Rosecrance Baldwin, Everything Now, MCD Books, 2021
Reyner Banham, Los Angeles: The Architecture of Four Ecologies, Harper and Row, 1971
Mike David, City of Quartz, Verso, 1990
David L. Ulin, Sidewalkin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5
D.J. Waldie, Holy Land, Norton,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