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목길 경제학자 Nov 05. 2017

히피 자본주의, 386 자본주의

“게이츠는 재미없는 공붓벌레예요. 그래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유전자에는 인간적 매력이 없죠.”


월터 아이작슨이 작업한 스티브 잡스 자서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실제로 잡스는 젊은 시절 히피 문화에 심취해 마약을 즐긴 것을 자랑삼아 얘기하고, 그 정신이 애플의 기업문화로 이어졌다고 강조하곤 했다.


애플과 마찬가지로 히피 출신 기업가가 창업한 유기농 슈퍼마켓 홀푸드마켓


히피문화와 탈물질주의 경제


히피 문화는 1960년대 중후반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며 일어난 저항운동이다. 당시 미국 젊은이들은 주류 문화와 기존 사회질서에 반기를 들고, 사랑·평화·자유를 추구하며, 물질문명이 아닌 정신적 가치와 인간성 회복을 주장했다. 그들의 저항정신은 우드스톡으로 대표되는 록 음악을 비롯해 패션, 미술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다채롭게 표출되었고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중 잡스는 자신이 푹 젖어들었던 히피 DNA를 그대로 비즈니스에 접목시켰다. 기존 비즈니스 방식을 거부하고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독특함을 추구해온 애플의 기업문화에는 이런 근간이 있었던 것이다.


히피 문화와 함께 창업한 기업은 애플뿐만이 아니다. 아이스크림 기업 벤 앤드 제리스, 화장품 회사 더 바디샵, 유기농 슈퍼 홀푸드마켓 등 뭔가 다른 방식으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기업들은 모두 창업자가 히피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히피 기업들이 앞장서자 다른 곳들도 점점 이런 문화에 동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물질주의의 첨병이었던 미국 기업들이 앞다투어 ‘Work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를 외치고 사회 공헌과 가치 중심적 사고를 강조하고 나서는 요즘 분위기는, 물질주의에 저항하던 히피 정신이 실리콘밸리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것으로 평가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히피 자본주의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질서가 출범하고 있는 것이다.


히피 자본주의의 주 무대는 생활산업이다. "히피들이 승리했다(The Hippies Have Won)." 지난 4월 4일 뉴욕타임스의 헤드라인 제목이 독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뉴욕타임스는 좋은 삶, 건강, 식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아이디어나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최근의 현상을 1960년대 ‘히피문화의 승리’라고 표현했다. 이 기사는 단지 요가나 명상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이 즐겨 소비하는 그래놀라, 콤부차(홍차버섯), 아몬드 우유 등 요즘 유행하는 식품 대다수가 히피문화에서 유래됐다고 주장했다.



다음커뮤니케이션 제주 본사 건물과 내부


한국 386세대와 IT 산업


미국에 히피 문화가 있다면 한국엔 운동권이 있었다.1980년대 권위주의에 저항해 들고일어났던 운동권 세력은 민주화를 앞당겼고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역동성을 선사했다. 그리고 당시의 주역이었던 386세대는 현재 경제 전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1999~2000년 벤처 붐을 타고 나타난 네이버, 다음, 엔씨소프트, 넥슨 등 주요 IT 기업들의 창업가도 모두 386세대다.


그렇다면 386세대도 히피 세대처럼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을 개척했을까? 아니라고 대답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국내에 자신이 운동권이었고 386이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말하는 기업인이 있냐는 것이다. 히피 기업들처럼 운동권 DNA가 그대로 새로운 자본주의의 탄생으로 연결됐다고 평가하긴 어렵지 않냐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86 세대들이 산업계에서 일궈낸 변화는 눈부시다. 네이버, 다음, 카카오, 엔씨소프트, 넥슨 등으로 대표되는 386 기업들은 자유로운 조직문화, 성과중심의 신속한 의사결정, 일과 삶의 균형 강조 등 기업문화의 혁신을 이끌고 있다.


이단아다운 틀을 깨는 사고(Think outside the Box)도 돋보인다. 카카오가 국내 메신저 시장을 선점하자, 네이버는 모바일 메신저 ‘라인’의 주 공략 무대를 과감히 일본으로 옮긴다. 덕분에 라인은 일본, 대만,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6억 명 이상이 사용하는 글로벌 서비스로 부상했고, 그위상과 지명도가 모기업 네이버를 넘어서는 쾌거를 이뤘다.


또한 넥슨은 2005년 본사를 일본으로 옮기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콘솔게임에서 온라인게임으로 넘어가고 있는 일본 시장의 트렌드 변화를 읽고 기회를 만들어내겠다는 전략이었는데, 모두가 중국 진출에 열중할 때 홀로 다른 길을 선택해 새로운 도약을 이루어낸 성공사례로 평가된다.


사회공헌 방식도 남다르다. 네이버는 2013년대 대안 대학 NHN넥스트를 설립하여 기존 대학 입시와 교육의 틀을 벗어나 인문학적 감성과 탄탄한 프로그래밍 실력을 겸비한 융합형 인재를 육성해왔다. 비록 최근에 그 아이덴티티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지만, 처음에 선언했던 사회공헌의 의지는 변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대안교육은 원래 386세대의 주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다음커뮤니케이션과 넥슨의 지주회사 NXC가 보여준 제주도 본사 이전 또한 신선하다. 각각 2004년과 2013년에 본사를 제주도로 옮긴 두 기업의 시도는 386 세대 기업만이 할 수 있는 과감한 도전이 아닐까 싶다. 인재, 자본, 시장이 집중된 수도권에 위치해야 기업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통념을 깨고, 자유롭고 쾌적한 환경을 가진 제주에서 혁신적인 기업 운영으로 실리콘밸리와 같은 산업생태계의 초석이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드러낸 것이다.


카카오가 운영하는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386세대 창업 기업의 과업


이제 386 기업들에게 남은 일은 벤처생태계 지원으로 시대정신을 완성하는 것이다. 한국의 벤처산업은 아직 새로운 산업을 자생적으로 창조하는 생태계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벤처생태계는 정부가 혼자 조성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기존 기업이 투자, 인수합병, 멘토링을 통해 스타트업 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마침 박근혜 정부가 주요 지역에 벤처기업을 지원하는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설립했다. 센터가 들어 17개 지역 중 386 세대 기업이 참여하는 지역은 네이버와 다음카카오가 각각 지원하는 춘천과 제주다. 필자는 이러한 386 벤처 선배들이 지원하는 센터가 대기업 중심센터보다 더 높은 성과를 낼 것으로 기대한다.


창조경제 과업은 386세대에게 또 하나의 기회다. 그들은 20대에 민주화를 쟁취했고, 30대에 벤처산업을 개척했다. 다른 세대는 누릴 수 없던 기회였다. 앞의 베이비붐 세대(1955~1962년생)는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 등 1910년대에 태어난 산업자본가들이 중심이 돼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완성하는 데 바빴고, 뒤쪽 포스트 386세대(1970년대 생)는 1997년,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새로운 시대를 꿈꿀 여유가 없었다.


1980년대 민주화 학생운동, 1990년대 벤처붐과 시민운동의 유산을 남긴 386 세대는 이미 ‘위대한 세대’ 일지 모른다. 그러나 과업을 다했다 말하기에는 아직 젊다. 이제 막 50대에 접어든 이들은 정치, 문화, 사회,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자유, 삶의 질, 평등 등 기성세대와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특유의 동력이 있다.


386세대가 창조경제를 견인해 산업화-민주화-탈산업화로 이어지는 한국 발전의 궤적을 완성한다면, 386 자본주의는 대한민국 역사의 한 장을 화려하게 수놓는 위대한 유산이 될 것이다.






후기

네이버는 2014년 네이버넥스트를 대안대학에서 일반 시민 교육기관으로 전환했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제주 본사 실험은 2014년 카카오 합병 후 사실상 중단됐다.

박근혜 정부 퇴진 이후에도  KT(경기), 네이버(강원), 카카오(제주) 등 통신·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 업종 기업들은 창조경제혁신센터 운영에 적극적이다.

386세대 이후 조기유학과 밀레니얼 세대도 이단아적 기업 문화로 기성 경제 시스템에 도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출처: 라이프스타일 도시, 위클리비즈, 2016

매거진의 이전글 탈산업화 극복 공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