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이라는 새로운 생태계
모든 것이 서울로 집중되는 시대, 각 지역의 골목은 저마다의 삶을 풍요롭고 충실하게 누릴 수 있는 대안이다. 모종린 교수는 10년 전부터 골목상권을 연구하며 로컬의 힘을 주장해 왔다. 성공과 실패만 존재하는 단 하나의 길에서 벗어나려면 골목이 당당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 전국 곳곳의 골목과 함께 다채롭게 피어날 우리의 삶을 기대해 본다.
다양한 삶을 향한 움직임
“좀 비정상이라고 생각했어요.” 정치경제학자인 모종린 교수는 한국 발전론에 대해 고민하던 차에 의문이 생겼다. “수도권 집중 현상을 문제적으로 바라봤죠. 바람직하지 않았거든요. 세계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죠.” 그는 당장의 현상이 아닌 그 앞을 내다봤다. “수도권 쏠림이 극대화되고 있지만, 흐름상 우리도 결국 지역적으로 균형 잡힌 나라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연구자로 그 과정을 함께 하고 싶었죠.”
2013년이었다. 가수 이효리가 서울을 떠나 이주했고,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크리에이터들이 큰 자본 없이 자신들만의 공간을 창조해내고 있었다. 이후 모종린 교수는 자신의 연구가 지 역 문화의 정상화에 기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국 골목길을 누볐다. 로컬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이미 변화가 일고 있었어요. 그해 사회적으로 주목했던 키워드가 라이프스타일, 나다움, 삶의 질, 친환경 등이었죠.” 기존에 별다른 라이프스타일 없이 비슷한 성공을 쫓고 비슷하게 실패했던 사람들이 삶의 기준을 바꾸면서 로컬이 활성화됐다.
“사람들이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대안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서구의 경우 70년 대부터 시작됐는데 우리는 좀 늦었죠.” 모종린 교수는 골목이 성장해 지역이 살아나면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다양한 삶이 가능해지면 모두가 수도권으로 가서 취업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겠죠. 삶의 질을 위해서도 골목은 더 많이 살아나야 합니다.”
가장 작은 곳에서 시작해 가장 커지는 로컬문화
로컬은 사전적인 의미로 ‘현지의’라고 번역되지만 한 단어로 정 의할 수 없는 복잡한 뜻을 두루 담고 있다. 로컬은 특정 지역이기도 하며, 그 지역의 개인이나 공동체 또 지역 안에서 생산되는 것과 그 지역을 대표하는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포함한다. “골목상권이 활성화되면서 로컬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2000년 대 초반 홍대, 삼청동, 이태원, 가로수길이 뜨고 지방에서 전주 한옥마을이 주목받았어요. 골목상권의 시작이었는데 그때는 아직 로컬로 묶이지 않았던 거죠.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창의적인 크리에이터들이 골목상권에 진입합니다.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었죠. 그들이 출현하면서 로컬문화가 발전됐어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주도한 건 대기업의 거대 브랜드가 아닌 골목길의 소상공인이었다. “골목길이 추억이나 감성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힙한 문화의 중심이 됐죠. 골목길은 로컬문화에 맞는 브랜드를 배출하는 새로운 생태계였어요.” 당시 정부의 기조였던 창조경제를 가장 작은 곳에서 꽃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모종린 교수는 그런 변화를 학문적으로 정리해 『골목길 자본론』과 『인문학,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다』, 『머물고 싶은 동네가 뜬다』세 권의 로컬문화 시리즈를 펴냈다. 그의 저서는 현재 대학의 로컬교육 교재로 쓰이고 있다.
“지금도 정부, 지자체와 로컬 브랜드와 로컬 콘텐츠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하고 있죠. 국가적으로도 로컬 생태계 구축은 굉장히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어요. 앞으로 경제의 중심은 지역이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도 골목은 새로운 시대의 대안이 될 거예요.”
로컬 문화를 대하는 소비자의 태도
그런데 과연 2024년 지금 우리에게 진정한 로컬문화가 꽃피고 있는 걸까? 로컬문화가 트렌드로 자리 잡고 난 뒤 어딜 가든 비슷한 골목이 펼쳐지는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어딜 가나 똑같다는 말들을 하죠. 그런데 진짜 골목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좀 기다려줄 필요가 있어요. 경주 황리단길을 예로 들어볼게요. 2016년 후 반쯤부터 경주 골목상권이 화제였습니다. 대릉원 입구에 노르딕이라는 브런치 카페가 생기면서 골목이 달라지기 시작했죠. 황남동 오래된 골목이 6개월 만에 가보고 싶은 힙한 골목으로 변화했어요. 그때 서울 경리단길이나 홍대 스타일의 음식 점들이 많이 들어갔죠. 그랬더니 경리단길인지 황리단길인지 모르겠다는 비아냥이 들려왔어요. 그런데요. 똑같은 음식점이라도 풍경이 달라요. 한옥과 고분의 압도적인 경관이 펼쳐지는 곳은 경주뿐이잖아요. 처음에는 경리단길 모습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경주 콘셉트가 나타나기 시작했지요. 지금 가면 경주와 불교 컨셉트의 디지인숍, 책방, 소품숍, 갤러리, 디저트와 베이커리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게 로컬문화인 거죠. 그런 것들을 면밀히 살피면서 즐기고 누리고 로컬에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다 똑같다고 치부해 버리면 발전이 없어요. 결국 다시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죠.”
똑같은 브랜드라도 각 지역의 고유한 풍경으로 대체불가능한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것이 로컬이 가진 힘이었다.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로컬 컨텐츠를 소비해야 합니다. 조금 불만스럽더라도 자꾸 관심을 가지고 찾아줘야 해요. 처음부터 비판적으로 볼 게 아니라 기다려줘야죠. 어느 길이든 최소한 2박 3일은 머물며 즐겨야 보이기 시작해요.”
골목상인이 만든 글로벌 서울
모종린 교수는 로컬문화가 시작되기 위해 필요한 상권으로 1단계 카페와 베이커리, 게스트하우스 등의 스테이, 독립서점, 디자인숍 등을 꼽았다. “그중 독립서점이 제일 중요해요. 저는 어느 골목을 가든 독립서점을 찾는데 그 공간에서 문화활동 을 하고 골목지도를 만들면서 동네 안내소 역할을 하거든요. 그런 동네 사랑방이 있고 카페나 베이커리 등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브랜드가 되면 골목문화가 꽃피기 시작하죠. 그리고 2단계로 지역만의 콘텐츠가 나오면 완전히 자리를 잡습니다. 경주라면 불교 컨텐츠, 전주는 전통문화 컨텐츠 등이겠죠. 그렇게 되면 산업으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동네 자체가 브랜드가 된다면 굳이 서울에 가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꾸릴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질 것이다. 로컬문화는 내가 사는 곳에서 충분히 만족하며 삶을 일굴 기반이 되어준다.
“신도시가 핫플레이스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앞으로 신도시를 새롭게 개발하기보다 기존의 골목을 살리는 데 집 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래는 문화산업의 시대입니다. 골목길이 문화를 촘촘하게 엮을 수 있어요. 서울이 글로벌 도시가 된 데에는 골목 크리에이터 소상공인들의 역할이 컸어요. 그들이 로컬 문화를 창출해 준 덕분이죠.”
그의 말대로 서울은 세계적인 도시가 됐다. 이제 관광객은 파 리나 도쿄의 골목을 누비듯 서울의 합정, 연남, 한남, 이태원, 성수, 압구정, 가로수길 등을 경험하려고 한국을 찾는다. “로컬 이 강해져서 가능했습니다. 골목 상인들이 만든 결과라고 봐요. 미래의 발전을 위해 로컬 문화는 더 크게 꽃 피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종린 교수는 더 많은 로컬 크리에이터가 생겨 나길 응원하며 올 상반기 로컬 크리에이터의 역할을 경제 전체로 확장해 분석한 『크리에이터 소사이어티』(가제)를 출간할 예정이다.
동네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일
수원 행궁동 입구의 정지영커피로스터즈에는 수원시의 감사 패가 붙어 있다고 한다. ‘행리단길의 첫 가게가 되어주셔서 감 사합니다’. 처음 작은 로스터리 카페로 시작한 그곳은 현재 행 궁동에 4개의 커피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 행궁동이 수원화 성의 풍경이 아름다운 찾고 싶은 골목길이 된 건 물론이다. 모 종린 교수는 대체 불가능한 콘텐츠를 만드는 건 모든 사람이 직면한 문제라며 AI시대, 앞으로 우리가 의존할 것은 나다움과 동네문화라고 강조했다. “동네 빵집, 동네 카페, 동네 오케스트라, 동네 미술, 동네 서점, 동네 밥집 많이 이용하고 사랑해주세요. AI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할 키워드는 로컬문화이고 그걸 성장시키는 건 우리 자신입니다.”
출처: 정책이 보이는 도서관, 2024.03 VOL.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