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꼼히 써두었던 살생부를 꺼내다
나는 엄마랑 아빠 앞에 앉아, 은행에서는 도무지 결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빠, 아빠는 나한테 항상 은행원 자식 중에 네가 제일 못났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으면, 어떻게 내 결혼이 은행에서 진행되기를 바랄 수 있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복수였다.
거실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 이야기를 듣던 중학교 2학년 때의 나와, 아빠한테 그 소리를 들으며 엄지손톱으로 두 번째 손가락을 꾹꾹 눌러대던 내가 2016년에 다시 나타나 그 때의 아빠에게 보내는 복수. 그렇게 말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아빠는 인상을 가만히 찌푸리며 그래서 모든 걸 안 하겠다는 거지? 라고 물었고, 나는 맞다고 대답했다.
엄마에게도 똑같이 말했다. 엄마, 엄마가 나를 쫓아다니면서 은행에서 결혼하라고 닦달을 해서 아빠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맡겼는데, 그러고 나니까 엄마는 갑자기 좋은 날과 시간을 안 받았다면서 나를 다시 들들 볶더라.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태연한 표정으로, 최대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하려고 애썼지만 마음 안 쪽은 떨렸다. 나는 지금 파혼을 말하고 있는 거구나. 파혼이라는 단어는 이상하게 생소하고 아팠다. 하지만 나는 최대한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복수이기도 했고 울부짖음이기도 했다. 나의 엄마아빠는 첫 딸의 첫 결혼을 앞두고 하고 싶은 게 많았다. 한 가정의 딸과 한 가정의 아들이 만나려면 양보하는 것도 필요하고 맞춰주는 것도 필요한데, 첫 결혼이라는 단어가 너무 벅찼는지 모두 자기가 원하는 게 제일이라고 계속 소리를 치고 있었다. 이건 꼭 해야 돼, 이건, 이건, 이것도, 당연하지!
시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드리기로 한 70만원을 매달 드린다는 약속과, 시어머니를 절대로 찾아가지 않고 연락하지도 않는다는 약속이 담긴 각서를 달라고 하셨던 건 지금 생각해도 참 괴상한 요청이다. 결혼식 날 우리 부모님을 찾아와, 시어머니와 상종하지 말라고 하려고 했다던 말씀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었다. 나는 이 사건을 무례하다고도 생각했고 천박하다고도 생각했다. 더 심한 단어가 있다면 얼마든지 꺼내와 그 앞에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오빠가 오빠의 아버지를 찾아가 화를 내기를 바랐다. 아버지 때문에 이 결혼이 깨졌어요, 그러니까 정신 좀 차리세요! 제발! 그 때의 나는 누구에게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었고 다 당신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 철없는 어른들이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걸까.
그리고 시아버지를 무서워하던 오빠에게도 화가 났다. 저 이상한 방식들로부터 왜 나를 지켜주지 못하는 걸까. 오빠는 왜 이렇게 복잡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이복의 시누이와 이부의 형제자매들이 가득한 환경으로 나를 초대하는 걸까. 더군다나 그 이복의 시누이는 예전에 아버님과 싸우고 연락을 끊었고, 이부의 형제자매들도 어머님과 연락을 끊었다는데.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나. 내 팔자를 내 손으로 꼬고 있는건가. 내 팔자를 스스로 꼴 만큼 이 남자를 사랑하는 내 자신이 아마도 제일 싫었던 것 같다. 나 자신이 가장 끔찍했던 시간이 있다면 아마 이 때가 아니었을까.
파혼을 선언하고 나서 나는 마음이 편하고 행복했다. 결혼이라는 주제를 꺼낸 이후로 가장 밥 잘 먹고 잘 웃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회사에는 잠시 결혼을 미뤘다고만 말했고 사람들은 잠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잠잠해졌다. 누구도 내 파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마 2월이었던 것 같다. 내가 있던 사무실은 2층이었는데, 햇빛이 아주 잘 들어오는 곳이었다. 커피를 내려 자리에 앉아 쏟아지는 일을 처리하는데 그게 참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한 편으로는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그 억울하고 화가 나는 상황이 모두 끝났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잠시 진공 상태의 방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어떠한 중력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안전한 공간으로.
그런데 오빠는 달랐다. 눈에 띄게 우울해져갔다. 웃지도 않고 나를 반갑게 대하지도 않았다.
도대체 이건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나는 파혼보다 오빠의 우울이 더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