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鄕愁)’라는 단어로 번역되긴 하지만 한자 그대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라는 표면적 의미만으로는 이 표현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나간 기억, 추억, 어린 시절, 옛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무언가가 확 덮쳐올 때 ‘아, 이건’이라는 생각이 들며 순간적으로 마음이 아리고 배속에 묵직한 무엇이 한바탕 내 안을 훑고 지나간다.
그리고 잊어버린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 암흑 속을 더듬는 답답한 기분에 잠기면서, 동시에 노을 지는 저녁 시간에 느껴지는 서글픈 감정과 세피아 색 사진을 보는 것 같은 애달픈 마음이 복합적으로 드는 것이다.
가끔 이 노스탤지어를 느끼기 위해 의식적으로 떠올리는 두 가지 장면이 있다.
첫 번째 장면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집 근처와 등굣길에 있던 만화방과 만화책들.
어릴 적에는 꽤 많은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사촌들이 가지고 있던 당시 유행한 전집들이 각자의 집에서 소임을 다한 뒤에는 가장 어린 나에게 모이기 일쑤였고 형제자매가 없던 나는 혼자 있을 때 그 책들을 하나씩 독파하곤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점차 책보다는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어도, 일곱 개나 되는 만화방에 둘러싸여 살던 우리들은 자연스레 그곳에 드나들게 되었다.
우리는 빌려온 만화책을 학교 사물함에 넣어놓고 돌려 보기도 하고 시험이 끝났을 때나 방학 때에는 시리즈 전권을 빌려와 며칠 내내 집에 누워서 만화책만 보기도 하였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웬만한 만화책을 섭렵하고 이제 무엇을 빌려 볼까 만화방을 전전하던 나는, 그중 가장 크고 오래된 ‘파랑새 책방’에서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래된 곳이라 그런지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이전 해적판이라고 불리는 무단복제된 만화책들이 구석구석 꽤 있었고 호기심에 그 책들을 빌려 보게 되었다.
군데군데 장면이 삭제되어 스토리 흐름이 이상하고 한국식으로 개명된 주인공 이름이 우스울 때도 있었지만 신의 아들 람세스 · 태양의 아들 람세스(이상 원작 호소카와 치에코, 왕가의 문장), 판타스틱 러버(원작 시노하라 치에, 하늘은 붉은 강가), 판타스틱 스토리(원작 미도리 유카코, 아득하고 먼 나라 이야기) 등 주로 고대 타임 슬립 물에 빠져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일이 즐거웠다.
만화의 영향력이 있었던 것인지 세계사 과목을 좋아하게 되어 수능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는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도 내게 남았다.
이렇게 만화책만 잔뜩 보던 내가 다시 그림 없는 책을 읽게 된 것은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이전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한 학기를 보내고 맞이한 여름 방학 어느 날 영어 공부를 해보겠다며 학교 도서관에 갔다. 하지만 공부는 하기 싫고 주변에 널린 게 책이었으니 딴짓을 하려면 책을 읽을 수밖에.
당시 유행했던 일본 작가들의 책이 모여 있던 책장에서 대충 몇 권의 책을 뽑았고 자리에 돌아와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책을 읽었고 몇 권을 더 빌려 집으로 돌아왔다.
책과 다시 만난 이후 틈만 나면 학교 도서관에서 들렀고, 책에 빠진 후에는 집에 돌아와서도 책을 덮을 수 없게 되어 여러 권씩 쌓아놓고 새벽까지 읽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 여름방학 내내 츠네카와 코타로, 무라야마 유카, 이쿠타 사요, 호시 신이치, 이시다 이라, 무라카미 류, 이사카 코타로, 니시 카나코 등 누가 유명한 작가이고 무엇이 유명한 작품인지, 장르는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활자 중독에라도 빠진 것처럼 처음 책을 뽑았던 책장의 책들을 두서없이 탐닉했다.
그때를 기억하면 어느새 내 지정석처럼 되어버린 도서관 창가의 나무 책상과 그곳으로 들어오는 햇빛, 창 틀 아래 돌로 만들어진 선반의 차가움, 여름 창 밖의 초록이 짙은 나무, 책장 사이사이를 탐방하던 시간이 떠오른다.
그리고 예의 그 노스탤지어가 밀려오며 아련해지는 것이다.
내게 노스탤지어를 일으키는 이 두 장면은 나의 책 읽기의 큰 흐름이었다.
과거로 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인간은 앞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는데,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돌아보면 수많은 책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담은 채 서 있고 나는 그 이야기들과 함께 나의 지난날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책들과 과거와 이야기들이 내 안에 쌓여 나라는 인간이 만들어졌음을 느낀다.어찌 되었든 나는 미래로 향할 것이고 새로운 내가 되어가는 과정에 책과 이야기가 언제나 함께 할 것임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