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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레이 Nov 11. 2016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그리고 테스

 몇 년전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우리나라 서점에서는 이 책을 선반이나 진열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직원에게 따로 요청해야만 19세 미만 구독 불가라는 딱지와 함께 비닐로 단단히 밀봉된 상태로 비로소 구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이 책을 서점에서 자유롭게 구할 수 있고 영화가 12세 이용가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러지 못한 게 다소 아쉽다.


뭐, 그분들에게는 빨간 딱지를 붙일 만한 이유가 나름 있었나 보죠... 


 최근 속편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심연 영화 예고편이 나왔고 다음해 17년 2월쯤에 개봉한다는데, 정말 기대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심리 변화를 관찰하고 읽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난 충분히 영화가 주인공들의 심리를 잘 쫓아갔다고 생각했지만 많은 원작 소설 팬들이 영화에 대해 혹평한 것을 보니 그들의 생각은 다른가보다. 나는 소설을 읽지 않아서 아마 그들보다 기대치가 낮아 평에 훨씬 관대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이 분이 말한 것처럼 할리퀸에 열광했던 감성이 내게 크게 작용했을 수도 있겠네요.

  

 영화로 본지 약 2년 남짓 흘렀지만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장면이 있다. 영화 초반부에 여주인공 아나스타샤가 남주인공 크리스찬 그레이로부터 첫 번째 선물을 받는다. 그 선물은 바로 뉴욕 경매에서 매우 높은 가격으로 낙찰된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의 초판본. 그 위에 테스의 한 구절이 적힌 메모가 붙여져 있다.

Why didn't you tell me there was danger?
Why didn't you warn me?
Ladies know what to guard against,
because they read novels that
tell them of these tricks.

어째서 제게 위험이 있다고 말하지 않으셨어요?
어째서 경고하지 않으셨어요?
숙녀들은 무엇을 경계해야하는지 알아요.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속임수를 알려주는
소설을 읽으니까요


  여기서 숙녀는 평민들과는 다른 부유한 상인-지주계급 이상 가문의 딸로, 여러 교육을 받아 교양을 쌓고 세상물정에 밝은 여성을 뜻한다. 문학덕후인 아나스타샤는 그 메모를 읽고 취향저격을 당한 듯 굉장히 감동받았으나, 사실 그 구절은 마치 아름다운 장미가 지닌 치명적인 가시처럼 앞으로 그녀가 겪을 고난을 암시하는 경고이자 복선이다. 왜냐하면 테스라는 소설은 능력, 지위 등을 모두 갖춘 남자가 순진하고 가진 것 없는 평범한 여자에게 사랑이 없는 욕망으로 접근할 때 생기는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다 갖기 원하는 아름다운 것들은 다 그만큼 가시가 있는 법

 소설 테스에서 귀족인 알렉 더버빌은 사랑과 욕망을 구별하지 못하는 위험한 남자이다. 한편 몰락한 귀족의 후손이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평범한 농민의 딸인 테스 더비필드는 알렉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어머니의 말만 듣고 도움을 청하고자 무작정 먼 친척인 그를 찾아간다. 하지만 테스는 아름다움에 취해 바다에 갔다가 날개를 절고 돌아온 나비마냥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머니에게 쏘아붙인 말이 바로 저 구절이다. 어째서 제게 위험이 있다고 말하지 않으셨어요. 돈 많고 교육을 잘 받은 숙녀들은 무엇을 경계해야하는지 알지만, 저는 아니었잖아요.

 이렇게 흙수저로 태어난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안타까운 모습도 생생하게 나타나있다. 불평등이 심화되는 우리나라 현실로 미루어 볼 때 크게 와 닿는다. 오늘날에도 높은 지위를 타고나지 못한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trick, 즉 속임수에 매번 넘어간다. 속임수를 알려주는 정보를 알지 못하기에.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 남주인공 그레이는 어렸을 적 트라우마로 인해 자신은 사랑이 불가능하다면서 사랑과 욕망 사이에서 매번 혼란을 겪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레이처럼 사랑과 욕망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것은 아닐까. '저 남(여)자는 쓰레기야' 라는 말은 감정 없이 속임수로 접근한 사람에 대한 불쾌감에서 비롯된다.


멀쩡하고 완벽하게 생겼지만 그만이 겪는 심각한 트라우마가 따로 있네요.

 영화의 끝무렵에서 아나스타샤는 자신에 대한 그레이의 감정이 사랑 없는 욕망이라고 애써 결정을 내리고 그를 떠나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마지막으로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 그리고 표정엔 아직 그레이를 쉽게 놓아줄 수 없음을 암시하는, 복잡 미묘한 떨림이 엔딩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처음 그들이 만났을 때, 그리고 마지막에 그들이 헤어질 때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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