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과 애착 사이
잘 버려야 한다는 집착에 대한 고민
나는 잘 버리지 못한다. 절약정신 때문인지, 집착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돈 되는 물건만 버리지 못하는 게 아닌 걸 봐서는 둘 다이거나 집착쪽에 더 가까운 거 같다. "집착"이라는 이미지가 싫어 속으론 부인해왔지만 이사 준비를 하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삿짐을 싸며 물건을 정리하는데 30년도 더 된 흔적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초딩시절 받은 반장 임명장, 과학경진대회 상장, 통지표, 방학 일기숙제, 졸업앨범, 친구들과 주고 받던 편지과 카드, 유치원때 부모님이 사주신 큐빅 박힌 딱정벌레 브로치. 이 정도는 고민하지 않고 나열할 수 있다.
이번에는 정말 맘먹고 짐을 줄이자고 결심한다. 추억으로 남기고 싶은 것들은 사진을 찍어 두고 흔적들을 과감하게 쓰레기 봉투에 던졌다. 쌓아두기만 하고 생전 펼쳐보지도 않았던 것들이 시원하게 비워지니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엄마는 자주 말씀하신다. "비워야 다시 채워질 수 있는 법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이사짐정리 이야기를 했더니 다들 깜짝 놀란다. 대부분 "초등학교 물건을 아직 끼고 살았다니!"라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런 반응을 보니 나의 집착이 평범하지는 않나보다.
문득, 무엇이 무서워 과거의 것들을 시원하게 버리지 못하고 살았을까 생각한다. 잘 버리는 사람들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대표적으로 우리 언니. 그녀는 나와 다르게 어려서부터 책상도, 방도 항상 깨끗하게 관리했다. 결혼한 이후 언니네 집에 가봐도 깨끗하다. 놀라운 것은 청소를 그리 열심히 하지도 않는데도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녀의 특징을 몇 가지 생각해본다.
- 안쓰는 물건은 과감히 버린다. 얼마에 구매했건, 몇 번을 썼건 개의치 않는다.
- 과거에 별로 집착하지 않는다. 현실에 충실하다.
- 스트레스 받는 일은 그냥 안한다. 다음날 시험이 있어도, 맘 편히 잔다. 졸려우면.
-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계속 집에 있어도 전혀 답답해하지 않는다.
반면, 나는 확실히 성향이 다르다.
- 비싸게 사놓고 몇번 안 쓴 물건은 ‘언젠가 쓰겠지’라는 생각으로 못버린다. 아까워서.
-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과거를 회상하며 혼자 센치해진다.
- 중요한 일이 있으면, 잠을 안잔다. 시험 직전까지 책을 본다. 그게 시험이 안나올 줄 알면서.
- 언니에 비하여 달리기, 등산 등 외부활동을 즐긴다.
가끔씩 달콤한 냄새가 나면 언니랑 둘이 살 때 함께 자주 사먹었던 사과파이가 생각난다. 랩을 들을 땐 언니와 함께 만들어 부르던 우리만의 노래가 생각난다. 중국어를 들을 땐, 언니가 고등학교 제2외국어로 택한 중국어를 동생과 나에게 가르쳐 주던 생각이 난다. "이! 얼! 싼! 쓰!" 교련시간에 배운 붕대 응급처치법을 가르쳐준 적도 있다. 과학자를 보면, 언니가 한국우주소년단 단원으로 미국을 다녀와 사온 우주인 아이스크림이 생각난다. 모두 즐거운 추억이지만, 이제는 너무 오래전 일이 되어버려 아련하고 슬픈 마음도 든다.
이렇게 나는 굳이 떠올릴 필요가 없는 과거의 장면들을 순간순간 떠올리며 혼자 감상에 젖는다. 혼자 짠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키득키득 웃기도 한다. 최근 며칠 간, 이 “집착”에 대해 고민했다. 이런 성향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얼마나 노력해야 고칠 수 있을지, 고친 삶은 어떻게 변할지.
그런데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또한 집착이 아닐까. 집착은 어떻게 보면 애착이기도 하다. 일어난 일과 나와 함께 한 물건에 애정이 있으니 쉽게 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뭐든 무조건 좋거나, 무조건 나쁜 것은 없다. 나의 이런 집착은 과거의 기억을 내 마음속에 고이 담아뒀다가 말이나 글로 살포시 담아낼 수 있으니 좋다. 무의미하게 혼자 시도때도 없이 청승을 떨거나 과거에 대한 후회로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면 곤란하지만.
아무래도 나의 이런 성향은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굳이 내 자신을 바꿀 필요가 있을까. 언니의 버림에 대한 스타일은 그런대로 멋있다. 그러나 나는 언니처럼 될 수 없고 그냥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 아쉬운 점만 보완하는 게 훨씬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결론 내렸다. 집착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로.
쾌적한 공간 활용을 위해 안쓰는 물건을 버리는 용기만 좀더 키우자. 청소를 좀더 자주하는 부지런함만 좀더 키우자. 일단 오늘은 냉장고 정리부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