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개월마다 정기적으로 대학병원 주치의와 만난다. 그런데 예약 시간에 맞춰 의사를 만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늘 진료실 밖에는 긴 줄이 있고, 한두 시간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다. 이런 현상을 환자의 수가 많아야 수익성이 보장되는 우리나라 의료체계의 허점으로 돌리는 사람도 있던데. 어쨌거나 외모와 행동이 똘똘이 스머프 같은 내 주치의 선생님은 항상 지쳐 있는 표정이다. 그러나 동네 아저씨 같은 정겨운 말투와 목소리로 내 질문에는 늘 친절히 대답해주시고, 때로는 질문하지 않은 것까지 대수롭지 않게 말씀해 주신다.
“별 이상은 없었나요?”
“네, 그런데 가끔씩 너무 피곤합니다.”
“... 그건 저도 그래요.”
선생님의 대답에 빵터졌다. 나에게는 진짜 ‘빵’ 터지면 웃음소리가 너무 커지는 습관이 있는데, 옆에 앉아있던 인턴이 내 웃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꾹꾹 눌러쓴 마스크 위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들, 그들의 고충과 긴장감을 수시간 동안 매일 품어야 하는 조그만 진료실에 잠시나마 Humor의 기운이 느껴졌다.
"Humor(유머, 해학)"라는 말은 고대 생리학에서의 체내에 흐르는 혈액, 점액, 담즙, 흑담즙 등 4종류의 체액을 의미했는데 이런 채액의 배합 정도에 따라 사람의 기분, 기질 등이 변화한다고 믿던 것이 뜻이 점차 변형되어 현재의 "해학"으로서의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오래 전부터 인간들이 유머의 진가에 대해 고민했는지 알 수 있다. 인류 존재 이래 많은 사람들이 유머에 대해 강조해왔다.
“유머가 완전히 없다면 삶에는 온통 불가능한 일 뿐일 것입니다.” (Colette, 1873-1954)
“좋은 유머는 성격의 특성이 아니라, 연습이 필요한 예술이다.” (데이비드 시베리, 1885-1960)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는 아이러니가 있고, 그 안에 유머가 있습니다.” (Bill Nye)
“제가 코미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공원과 경찰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Charlie Chaplin, 1889-1977)
유머가 어울리지 않는 때와 장소는 너무나 많다. 눈물이 찔끔나는, 너무나 아픈 주사를 맞고 누워있는데 누군가 비아냥거리며 농담을 했다면 난 그 사람 얼굴에 펀치를 날렸을 것이다. 그 농담이 나의 순간적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의도였을 수도 있다. 결국 모든 농담은 농담을 받는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해학’이 될 수도 있고, ‘비아냥’이 될 수도 있다.
농담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타인이 하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농담이 아닌 헛소리도 내 귀의 여과기를 통해 농담으로 승화시켜 받아들이며 살고 싶다. 내가 내 기분의 주인이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과 중력에 못이겨 입과 눈과 볼살이 점점 아래로 흘러내릴 텐데, 유머를 주고받는 순간이나마 입꼬리와 눈꼬리가 한껏 올라가고 나의 기분도 긴장을 시원하게 놓아버릴 수 있는 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농담과 웃음으로 떨쳐버릴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일부는 웃음거리인양 만들어 그 무게를 최소화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나의 태도만 바꾼다면. 이유 없이 우울하고 기운이 없을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나와 타인의 실수를 인간다움으로 성찰하고 ‘해학’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중세의 철학을 지배했다던 아리스토텔레스 형님도 입꼬리와 눈꼬리를 올리는 유머의 힘을 알았다.
“유머는 오직 중력의 시험이고 유머의 중력입니다. 농담을 지니고 있지 않은 주제는 의심스럽습니다.” Aristotle(384 BC – 322 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