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에는 위와 유사한 내용의 문구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잡지 인터뷰 기사 또는 서점 에세이 섹션에서 만날 수 있는, 불행했던 과거를 등지고 새로운 선택을 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얽매이지 않고 마음가는대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자유! 얼마나 힙한선택인가. 얼마나 용기있는 선택인가. 뭐, 이런 분위기.
변화의 물결이 고조되면서 이제는 성실하게 회사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루저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는 소중한 젊음, 소중한 인생에서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꾸역꾸역 하면서까지 생계를 위해,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더이상 참고 살지 말라고, 자유를 선언하라고 부축이는 것 같다.
인정한다. 그런 선언을 하는 건 분명히 용기있는 행동이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과감히 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확고한 자신만의 철학과 자신만의 나침반이 확고해야 가능하다. 그렇다면, 직장에서 하기 싫은 업무를 하면서, 나의 능력을 훌쩍 넘어서 보이는 눈앞에 과제를 해결하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은 단지 용기가 부족한 것으로 치부해야 할까.
나는 어려운 순간들을 참으면서 나름의 꿈을 가지고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도 자유를 선언을 하는 것만큼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믿는다. 상황의 난감함과 짜증남의 고개를 넘을 때마다 그 사람은 단순히 직장인으로서가 아니라, 한명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더 큰 책임과 대응능력을 갖춘 어른이 된다. 직장과 일은 그 과정을 제공하는 수단이 된다. 그 과정에서 실제 하는 일의 내용은 형식일 뿐이다. 엔터사에 소속된 영화배우나 편의점을 운영하는 사장님이나 연구실에서 신약을 만드는 사람이나 형식은 다르지만 큰 뼈대는 같다고 본다. 아무리 열망하는 일을 하게 되도 누구나 크고 작은 고난의 고개를 마주하게 된다.
세상의 직장인들은 모두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해야한다. 떳떳하게 스스로의 밥벌이를 책임지는 모든 사람들은 성인이다. 해가 뜨지 않는 추운 겨울 아침, 패딩을 입고 새벽 출근길에 나서는 것, 폭염에도 넥타이를 꽉 메고, 타이트한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서는 것, 때론 거슬리는 말을 듣고, 때론 하고 싶지 않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 익숙하지 않는 일에 익숙해지기 위해 긴장하고 계속 연습해야 하는 것, 불편한 상황을 정면으로 맞이하고,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 중압감을 느끼는 것. 이런 것들 모두 내가 인생의 주인이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노동의 진짜 의미는 자기가 맡은 일을 달성하고 실적을 내는 것뿐만 아니라 개인의 내면을 완성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나모리 가즈오, <왜 일하는가>
“일”이 인격의 완성을 위한 과정이라니, 너무 심한 자기위안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발짝만 더 깊게 들어가보자. 때론 자유를 희생하고, 때론 욱하는 감정을 추스르며 맡은 임무를 다하려는 노력은 내 안에 축적된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다양한 상황에서 적절히 대처하고 완만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인격체로 조금씩 변한다. 이게 내면을 완성하는 과정이 아닌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내가 편하고 익숙한 환경을 선택하게 설계돼있다. 그 본능을 거슬러 자신을 불편한 상황에 모는 데에 ‘일’만큼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없다. 즉, ‘일’만큼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도 없다.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작은 사건으로 상처를 받기도 하고 큰 변화를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들이기도 해야한다. 우리는 1센티미터씩, 알게 모르게 변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자신을 재정의하고 우리의 내면을 완성해간다.
퇴사를 하는 용기만 칭송될 게 아니라, 본능을 거슬러 조금씩, 꿈틀꿈틀, 내 안에 완성체를 키워나가며 불편함을 감내하는 인내심도 존경받아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