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국 조사에 따르면 평생 외출준비를 하는데 쓰이는 시간은 여자는 136일, 남자는 46일이라고 한다. 타인을 그만큼 많이 신경쓴다는 의미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우리는 생각, 말, 행동 등 모든 부분에서 타인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살아간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깊이에의 강요>에서 “타인의 시선”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려준다. 젊은 예술가인 주인공은 어느 평론가로부터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라는 작품평을 듣는다. 그 이후 그녀는 절망에 빠졌고, 종국에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만다. 그녀의 죽음 이후, 평론가는 이렇게 기고한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그냥 말을 위한 말. 공허한 타인의 말에 상처받고 고민하지만, 그 말은 그 타인의 상황이나 편의에 따라 쉽게 변할 수 있다. 고통받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 내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그의 생각을 추정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을 때, 타인은 게의치 않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가끔씩 지인들과 대화 하면서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개인사를 상대가 기억하지 못할 때 그렇다. 사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나 또한 타인의 개인사를 전부 기억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에 대한 나의 기대치와 실제 상대의 수준은 늘 갭이 크다. 기대도, 실망도, 위로도, 모두 다 내 몫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생각지도 못했던 나의 무언가를, 생각지도 못하게 기억했을 때, 나는 상대를 달리보게 되고 감동하게 된다. 이번에는 오히려 내가 타인의 무언가을 깜빡하고 놓쳤던 것들을 반성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나를 더 겸손하고 감사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제한적이다. 가정사, 직장, 학교, 수많은 경조사 등 기본적으로 챙겨야 하는 것들은 말할 것도 없고, 쉽고 편하게 소비할 컨텐츠가 넘쳐난다. 제한적 개인은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옵션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순위에서 밀려난 것들은 저 깊은 망각의 늪에 사장된다. 그 늪, 그 타인의 시선의 노예가 될 것인가.
한가지 확실한 것은 <깊이에의 강요>의 젊은 예술가처럼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매일, 차분히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삶에서 정말 중요한 사람, 정말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검토해야 한다. 기술의 발달로 인류 역사의 그 어느 시기보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은 과거 100년동안 인간이 겪었던 만큼의 큰 변화가 밀려올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무의미한 타인의 시선에 집중하는 낭비를 멈춰야 한다.
고백하건대,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바로 “타인의 시선”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벽을 뛰어넘고 싶었다. 내 생각이 타인에게 노출되는 것이 무서웠다. 때론 치졸하고, 때론 소심하고, 때론 유아적인 생각과 감정들이 어떻게 비춰질까 두려웠다. 확실히 난 관종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작은 공간에 내면의 이야기를 공유하다 보면, “타인의 시선”에서 좀더 자유로워지고, 그러면 내 안의 공간이 더 커질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나름 엄청난 용기를 낸 시작이었다.
어느덧, 이렇게 브런치를 시작한 나의 은밀한 동기까지 고백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얻었다. 즐거운 상상은 현실이 됐다.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고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조금 덜 고려하고, 내면의 시선에 더 집중하고 싶다. 더 단단해지고 싶다. 매일 1미리미터씩이라도 조금씩 더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