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거리

밀땅은 지혜였다

by Riley

적당한 거리를 두라고들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의 중요성을 체험한다. 심지어 그것은 성숙의 지표가 아닐까도 싶다. 관계가 됐던,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이 됐건. 직관적으로 그 "적당함"을 알게 된다면, 옳은 방향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적당한 거리는 무작정 노력한다고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 어렵다. 누군가와 적당한 거리를 두기 위해 무조건 연락을 끊는다고 가능할까. 그건 아닐 것이다. 물리적이건 정신적이건, 자연스럽게 적당한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그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려고 하면 불필요한 오해나 고통을 수반할 수 있다.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어떤 계기로 다시 좁혀진다. 달아날 필요도 없고 너무 다가갈 필요도 없다. 그저 열린 상태로 침착하게 걸어가면 된다. 인연이면 적당한 거리 이내로 좁혀지고 아니면 완전히 떨어지게 될 수도 있겠다. 무언가에 과도한 집착을 버려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나의 부정적인 감정도 마찬가지다.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기 위해 감정을 무시하면 내 안에서 곪는다. 감정을 잘 살펴보되, 거기 빠져야 하지 않아야 한다. 그게 반복되면, 어쩌면 언젠가 내가 내 감정의 주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뭐, 말이야 다 쉽다. 그걸 잘 아는 사람이 멋있어 보인다. 이를 가르켜 나는 연륜 또는 내공이라고 부르겠다.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 매일 실패한다. 멋진 사람이 되는 게 내 희망사항이자 목표이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난 뒤 개인의 충격을 도덕적 무능으로 연결해 그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가 없다는 문장은 적당한 거리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타인의 감정에 푹 빠져 빼몰된다고 해서 내가 그를 도울 수 있을까. 아니다. 내가 그 감정을 모두 이해한다고 또는 이해한다고 말한다고 타인의 고통이 감소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옆에 있어주는게 더 큰 힘이 될 수 있다.


법륜스님은 멋진 분이다. 그가 쏟아지는 사연에 정곡을 찌르는 조언을 해주는 이유는 그가 상대의 감정에 푹 빠졌기 때문은 아니다. 각자 다른 모양의 고통을 겪는 모든 이들과 가까운 친분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스님이 조언을 해주실 때 가끔 너무 냉정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건 냉정함이 아니었다. 그건 다름아닌 지혜다.


마찬가지로 나의 감정을 타인에게 위로 받고자 의지하는 마음도 경계해야 한다. 내가 의지할 가장 큰 존재는 내 자신임을 해를 거듭할수록 체감한다. 다만 나에게 지혜의 조각을 나눠줄 수 있는 현자를 가까이하면 그게 나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이 된다. 그 힘은 나를 더 독립적으로 지탱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매번 반복되는 일상을 기계처럼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 힘을 조금씩 키우고 있음을 인지하면 좋겠다.



“말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남의 사정 같은 건 없다. 인종과 언어, 계급의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소통의 무한한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 비평가 존 버거 John Peter Berger가 말했듯이, 타인의 고통을 보고 난 뒤 충격을 개인의 ‘도덕적 무능‘ 으로 연결해 그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도 없다. 때론 죄책감이라는 통증을 넘어서야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길이 열린다는는 걸 말하고 싶다.나의 것이 아닌 고통을 보는 일에는 완벽함이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서로의 부족함을, 미욱한 애씀의 흔적을 조금씩 용인하면서라도 움직이기를 바라기에“

-김인정 <고통 구경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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