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6년차 즈음 되었던 것 같다. 입사 때부터 강도 높은 업무에 한참 지쳐 있을 무렵이었다. 하루는 입사 동기와 점심밥을 먹으면서 푸념을 했다.
“앞으로 무얼 해서 먹고살 지 걱정이에요.”
당시 나보다 4살 많은 동기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무얼 해서 먹고살 지를 걱정할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순간 나는 당황스러워, “맞네요…”라며 말을 흐렸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업종을 바꿔 이직도 했다. 10년 전 어느 평범한 점심식사 중 나눈 짧은 대화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 때 내 질문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리라. 대학까지 나와 멀쩡한 직장생활을 하던 내가 무얼 먹고 살지를 걱정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당시 나는 배가 부른 것을 넘어 교만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나는 어떤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누구와 함께 밥벌이를 할 것인가를 더 중시한다. ‘누구와 함께’라는 화두는 꼭 밥벌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와 함께 나의 일상(밥벌이를 포함해서)을 나누고, 누구와 함께 나와 너의 슬픔과 기쁨을 나눌지를 고민하면서 매일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궁리해야 한다고 믿는다. 유유상종. 근묵자흑.
이제 중년에 들어서니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있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긴다. 물론 이 나이 즈음 되면, 바쁜 직장생활, 결혼, 육아 등으로 맘 먹지 않아도 자연스레 연락이 끓기는 사람들도 생긴다. 반면 ‘옛 정’이라는 명분으로 안부를 묻고 습관적으로 만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고독함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시간에 쫓겨 일년에 몇 번 보지 못할지라도 그 사람의 존재 자체만으로 힘이 되고 따뜻한 마음 씀씀이가 전해지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내가 무슨 일을 하던, 어디에 있건, 내가 손을 뻗으면 잡아줄 찐 친구들이다.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외삼촌이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누군가 죽은 후 그 사람 장례식장에 와서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는 친구가 5명만 되도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던데, 내가 몇 시간 지켜보니 너희 아버지는 성공한 분 같다.” 아빠의 영정 사진 앞에서 펑펑 울으셨다는 그 친구분들이 아빠의 찐 친구들일 것이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지혜 중 최고의 지혜라고 한다. 엄마는 30년간 정기적으로 나가던 모임에 나가는 것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시며, “앞으로 남은 인생동안 그런 의미 없는 만남에 시간을 낭비하기 싫다,”라고 하셨다. 30년 인연이면 가정생활, 육아,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 재테크, 취미 등을 함께 나눈 사람들이다. 그런데 70대 중반에 그런 사람들과 단절하겠다는 결단을 할 수 있다는 게 매우 놀랍고 신기했다. 그 만큼 찐 사람을 보는 안목이란 게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닐 뿐더러 그 안목에 기반해 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나는 타인에게 어떤 사람인지 돌이켜본다. 의도와 다르게 나의 진심이 와전되어 오해를 샀던 경우도 있고, 내 이런 저런 상황때문에 타인의 아픔을 충분히 공감해주지 못한 경우도 있다. 시간이 흘러도 후회와 아쉬움은 남고 미안한 마음이 전해지기를 기도한다. 실수가 됐건 오해가 됐건 모두 다 내 책임이다. 확실한 것은 내가 먼저 내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와 애정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오직 그럴 때만이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고 내 자신에게도 날카로운 안목으로 찐 친구를 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무언가를 잘 포장하는 센스만 키울 것이 아니라, 따뜻한 시선으로 찐 사람을 분별할 수 있는 세련된 안목을 가진 어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