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9일 새벽
꽃샘추위가 다시 오는 듯합니다. 며칠 안에 최저 기온이 0도까지 떨어진다고 하니 이게 봄인지 겨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추위를 잘 견디는 몸이라서 굳이 집어넣은 패딩을 다시 꺼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다행이네요.
오늘은 컴퓨터와 관련된 이야기 하나를 먼저 가져와봅니다. 여러분들은 컴퓨터를 쓸 때, SSD나 하드디스크 등 이른바 보조기억장치의 문자가 왜 C부터 시작하는지 아시나요? 저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들은 상당수가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그것은 과거에 많은 컴퓨터에 있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때문입니다. 90년대생까지는 학교에서 컴퓨터 수업 시간에 자료를 제출할 때 플로피 디스크를 썼던 기억이 있을 텐데요,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는 80년대부터 하드디스크가 보급되기 전까지 사람들이 쓸 수 있는 저장장치는 사실상 플로피 디스크뿐이었고, 당시 플로피 디스크를 복사하는 일도 많았기 때문에 2개를 달았다고 하죠. 그래서 A, B 드라이브는 플로피 디스크가 가져가고, 나중에 하드디스크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드디스크는 다음 문자열인 C를 가져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하드디스크에 운영체제가 설치되기 시작하며 많은 소프트웨어들이 이걸 바탕으로 개발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굳어졌고, 이후 플로피 디스크가 완전히 사장된 뒤에도 유지된 것이죠. 지금도 호환성을 이유로 A, B 드라이브는 자동으로 배정되지 않으며, 어떻게든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구해서 연결을 하면 A, B 드라이브로 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연하겠지만, 강제로 A, B 드라이브를 USB 드라이브나 SSD, 하드디스크 등 온갖 저장장치의 문자열로 지정할 수 있습니다. 플로피 디스크 자체가 거의 쓰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기술의 발전으로 문자열을 고정시킬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거기에 더해, 운영체제도 굳이 C 드라이브에 깔 필요도 없죠. 단지 '지금 이걸 바꾸면 문제가 발생하니 일단은 이렇게 만들자'와 '쟤네들이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이걸 따라가면 되겠지?'가 수십 년 동안 섞이면서 굳어져 버렸고, 지금에 와서 이를 바꾸려고 하면 기존에 남아있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문제가 발생하고 사람들에게도 큰 혼란이 생길 것이기 때문에 놔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가지의 현상이나 제도 등이 굳어져 그것을 바꾸려고 할 때 물질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거나, 심리적인 저항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우리는 '경로의존성'이라고 하죠. 경로의존성이 생기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한번 적응한 것을 벗어나려 할 때 본능적으로 저항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집단 내 약속으로 굳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바꾸자고 말을 꺼내기 어려운 경우 — 혹은 소수의 변화를 부르짖는 사람을 묵살하는 다수 때문 — 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경로의존성 덕분에 금전적 이익을 얻고 있던 소수의 권력자들이 위와 같은 이유를 뒤집어쓰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계속 가지고 싶은 것이겠죠.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원래 그런 거는 없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이렇게 했기 때문에'라는 말의 함정은 '애초에' 한건 왜 그렇게 했냐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처음 그 현상이 굳어지게 된 이유가 당시에는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었을지라도 그게 수 십 년, 수 백 년 지난 뒤에도 여전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일 경우는 손에 꼽습니다. 사실 저는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화를 말하는 사람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먼저 나서는 것이고,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이것을 알고 있음에도 굳이 변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변화가 두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변화에는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냐가 변화의 성공과 실패를 가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원래 그런 것은 없다'는 건 모두가 알지만, 그것만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하면 아무도 변화에 동조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기존 편집 스타일을 구독자들이 질려할 것 같다는 이유로 이를 바꾸는 데도, 미리 말을 하지 않으면 많은 저항의 댓글이 달립니다. 생각 외로 사소한 부분에서부터도 왜 변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왜 지금인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를 사람들에게 말해야 변화하는 것을 인정하는 상황에, 사회를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더욱더 정교하고 탄탄한 근거와 오랜 기간의 설득 과정이 필요하게 될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플로피 디스크의 사례처럼 — 변화의 필요성도, 설득의 과정도 없이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 변화의 때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글을 다 쓰고 고치다 보니 밖에는 비가 왔다 내렸다를 반복하네요. 며칠 뒤에 날도 추워진다고 하니, 모두 감기 조심하시길 기원합니다.
리르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