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거꾸로 변해도

2024년 3월 22일 오후

by 리르리안

엊그제 본 날씨는 꽃샘추위였는데 다행히도 산책을 간 길이 춥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날이 흐린 것이 저녁쯤 되면 비가 내릴 것 같네요. 미세먼지도 간간히 느껴지는 이때 건강 유의하시길 기원합니다.




저는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곳 — 정확하게는 부모님이 이사를 하셔서 오게된 이곳 — 에서 6년 정도 살았습니다. 코로나때문에 3년이 여름철 땅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녹듯 사라져버린 것 같아서 벌써 6년인가?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어쨌든 시간은 흘러버렸습니다. 아무튼, 제가 이사온 여기도 조성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은 신도시여서, 어찌보면 이 신도시의 발전을 몸소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곳은 점점 변화하고 있습니다. 공사만 하던 아파트들도 다들 분양하기 시작했고, 읍내에 조그맣게 있던 우체국이며 소방서며 동사무소까지 다들 내부를 증축하거나 아예 더 넓은 부지로 이사를 갔습니다. 아침저녁마다 온 동네에 차들이 가득해 귀성길/귀경길을 방불케 하고, 그럼에도 서울 가는 광역버스 말고는 저녁시간에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것이 힘들어 친구들을 만나면 11시에 칼같이 집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지하철은 몇년째 '올해 개통한다!'를 반복하고 있어 더 심해지는 느낌이죠.


아무튼, 이런 변화를 보는 것은 백수로서 소소한 재미 중 하나입니다. 운동 겸 산책을 다니다보면 이런 변화를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주로 신도시 경계를 한바퀴 도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이따금씩은 경계 밖의 도로로 걸어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인도조차 없던 도로라 걷는 건 그냥 포기했었는데, 어느 새 그 쪽에 사는 사람들과 직장인들을 위해 도보를 깔아두어서 요즘에는 편하게 왔다갔다합니다. 저번주에는 서쪽, 오늘은 북쪽, 이런 곳들은 특히나 자주 가는게 아니어서 변화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신도시 효과를 받고 올라가는 원룸이나 다세 빌라를 보며 '아무리 신도시 근처라지만 너무 많은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은 여기 이사온 뒤에 무려 5년만에 공장단지 쪽으로 걸어가보기로 했습니다. 이곳도 예전에는 왕복 2~4차선의 평범한 시골 — 하지만 곳곳에 공장이 가득한 곳 — 도로였지만 지금은 6차선으로 비교적 잘 닦인 도로가 되었고, 인도도 사람들이 자주 걸어다니는만큼 산업단지 안의 인도처럼 풀이 무성하게 자라지 않아 나름 걷기 좋았습니다.


그 곳에서, 다 쓰러져가는 버스 정류장을 발견했습니다. 그 뒤로 난 6차선 도로에 멀끔한 전자식 버스정류장이 있는 걸로 봐서는 아마 예전에 쓰던 버스정류장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상합니다. 뒤에 있는 도로에 있던 거라면 도로를 향해 있어야 할 버스정류장이 도로를 등지고 있는 모습, 말 그대로 거꾸로 정류장이 서 있습니다. 그렇다고 옮긴 것도 아닌게, 비록 군데군데 휘어져 있지만 바닥은 온전히 땅에 박혀있는 모습입니다. 마치 원래부터 이 자리에 계속 있어왔다는 느낌입니다. 거기에 정류장에 붙어있는 버스 시간표, 생각보다 너무 깨끗한 것이 버려진 지 얼마 안된 것 같습니다.


이미 예상하셨겠지만 이 정류장은 도로가 2차선이던 시절에 있던, 옆에 있던 마을 입구에 있던 버스정류장이었습니다. 애초에 2차선 도로는 흔히 우리가 시골에서 많이 보는 갓길 없는 도로였고, 버스가 설 공간이 전혀 없는 길이었습니다. 마을버스는 버스를 세울 공간을 위해 마을 입구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들렸다 다시 2차선 도로로 들어가는 형태였던 것 같습니다. 차 한대만 지나다닐 수 있는 곳에 양 방향 모두가 이용하는 버스정류장이었던 것이죠. 불과 2010년도 이전까지만 해도 이 근처에는 시골 마을이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됩니다. 근처에 신도시가 생기고 도로가 확장되며 이 마을 주변으로 공장도 점점 많아졌고, 개발로 마을이 사라져 길도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버스는 여전히 다녀야 하니 넓어진 도로 쪽으로 옮겨 새로 정류장을 세운 것이죠. 마을이 없으니 앉아있을 사람도 없기에 앉을 공간 없이 표지판 하나 덜렁 세워진 형태로 변한 것은 덤입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의 읍내 나들이를 책임지던 버스정류장은, 주변 공장단지로의 출퇴근을 하고자 하는 근로자들을 위한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그 기능이 바뀌게 됩니다(물론 마을버스도 여전히 다니긴 합니다). 마을은 신도시와 공장에 밀려 사라지고 버스정류장은 거꾸로 서서 그 능력을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예전에 남아있던 마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진이나 기념품 등을 통해 어린 시절, 그리고 즐거웠던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가끔씩 책상 위의 기념품을 보며 즐거웠던 제주도 여행을 떠올리고, 친구들의 얼굴을 통해 지루했던 야자 시간을 타파했던 라디오 사연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찾아간 옛날 동네의, 다 바뀌어버린 놀이터 기구 사이에 아직 남아있는 낡은 벤치에 앉아 유년시절 즐기던 흙놀이의 즐거움을 생각해보기도 하죠. 세상은 한 해가 멀다하고 변해가지만, 기억 속에서는 영원한 어린 아이로, 즐거운 청년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그것만으로도 가끔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힘을 받습니다.




글을 다 쓰고 나니 해가 다 저물었네요. 아직 해가 질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비가 오려고 하나 봅니다. 이번 주말에는 저에게 좋은 기회가 왔는데요, 제 무운을 스스로 빌면서 독자님들도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리르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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