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버리게 되는 건 매한가지겠죠 上

by 릴랴



마음속의 아주 깊은 곳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어둡고 깊고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두려움으로 걸음을 주춤거리면서도 그 사람은 꾸역꾸역 나아갔다. 그리고 긴 끝도 없는 계단을 내려가듯이 한참을 내려갔을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래도 그 끝이 없어 보이는 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마침내 도착할 곳을 알고 있었으니까. 시간감각도 공간감 각도 느껴지지 않는 캄캄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는 문이 있었다. 드디어 도달해야 했던 곳에 도착했던 그 사람은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그 안에는 그 사람과 같은 얼굴을 한 어린아이가 있다. 어른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인지 담담한 표정이었고, 조금도 놀라지 않았던 듯했다. 어린아이도 아무 표정 없이 어른이 할 행동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어른은 별말 없이 문안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문이 닫히자 어린아이가 조금 웃었다.



"네가 오길 계속 기다렸어. 언젠가는 이 이야기를 너한테 해줄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면서.”


어린아이의 외형을 한 그것은 딱히 아이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어딘가 연륜이 느껴지는 얼굴은 몹시 지쳐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어딘가 가벼워 보였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들어줘.”



“그래.”



지금까지 외면하고 피해왔던 만큼 꽤 긴 이야기가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어른이 듣겠다는 제스처를 취한 후 아이의 눈을 응시했다.


“내가 보냈던 메시지들은 이제 알아차렸어? 계속 이야기했지? 가는 것들을 붙잡지 말라고, 스러지는 것들은 순순히 놓아줘야 한다고.”


어른은 가만히 그 말을 경청했다.


“모든 것들은 언제가 다 끝이 나. 흘러가는 것들은 보내줘야 하는 거야.”



아이의 말을 듣던 어른의 표정이 조금 쓸쓸하고 착잡하게 변했지만, 바로 아무 표정도 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계속 말해.”


“과거도 기억도 나도 아무리 좋았던 것이든 나빴던 것이든 놓아줘야 네가 진짜 행복해질 수 있어. 붙잡고 있는 건 너야. ……기억해. 주도권은 항상 너한테 있어. 더 이상 과거한테도 나한테도 붙들려있지 마. 네가 붙잡은 손을 놓는다면 이 이상 그 무엇도 너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해.”


“어째서 나한테 주도권이 있다는 거야?”


어른이 느끼기에는 그건 해야 하는 질문인 것 같았다.


“그건… 안 가르쳐줄래. 날 잡고 있는 게 뭔지는 알아? 이건 네 죄책감이야. 붙잡고 있는 것도 놓는 것도 네가 선택할 수 있어. 붙잡고 있는 건 항상 너였으니까.”



어른이 그 말에 아래를 내려봤다. 그제야 절실하게 붙잡고 있는 자신의 손이 보였다. 아이의 옷깃을 필사적으로 간절하게 잡고 있었다는 게 드디어 바로 보이게 되자, 어른의 눈은 크게 뜨이고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동요하고 말았다.


“이제 조금 보이지?”


“…왜 이런 걸 알려주는 거야?”


이제 어른의 목소리는 말 끝이 갈라지면서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지만 꿋꿋하게 물어봤다.



“그건 내가 너의 발목을 더 이상 잡고 싶지 않아서 그래. 나는 네가 선택을 하길 바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여기서 벗어나길 바라고. 너를 위해서 이제 그만 나를 놓아줬으면 해. ……너를 불러내기 위해서 방법이 조금 지나쳤다는 건 인정할게. 하지만 나도 여유가 없었어. 미안해."


어른이 어렴풋하게 추측했던 부분이 명확하게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아이의 마지막 말에 그러냐며 생각을 정리하면서 어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막연하게 어느 정도 예상하는 것과 본인에게 확실하게 확언받는 건 인식에 있어서 하늘과 땅에 가까운 차이가 있으니까.



“안 그래도 그런 거 같았어. 그래서 들으러 온 거였으니까. 너는…… 그러니까, …성공했네? 나를 불러냈으니까.”


"나는 너를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어."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듣고 있던 어른의 표정이 그 말을 듣고 조금 일렁거렸다.

얼굴에는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말을 할까도 망설였지만 결국 거기에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이 말 꼭 하고 싶었는데 네가 그렇게 안 오더라. 얼마나 기다렸는지 넌 모를 거야.”



아이가 조금 툴툴대면서 말했지만 조금 서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기도 잠시였고 곧 마음을 가다듬는 듯 보이더니 이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네가 겪었던 모든 일이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겠지만, 이제 더 이상 그것들이 너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나는 반드시 한 번은 너를 마주해야 했어. 그래서 그랬던 거야."




잠시 아이가 어른이 자신을 꽉 붙들고 있는 손을 작은 두 손으로 꼭 잡아 눈을 내리깔고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들어올려 눈을 맞추고 다시 말했다.



“이제 너는 행복해질 필요가 있어. 나는 이대로 같이 있어도 상관없지만, 그랬다간 네가 행복하진 않을 것 같네. 너는…… 최선을 다했어. 내가 알아. 이제 편안해져도 돼. 소중했던 것과 아팠던 기억들, 과거들 그리고 나하고 그만 작별해도 된다는 소리야. 이제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마.”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담담히 쏟아내던 이야기들이 끝났다. 너의 진심들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왔다. 행복해져도 된다고 했다. 과거를 놔두고 가버려도 된다고 했다. 이제 더 이상 못해냈던 것들에 미안해하지 말고 편안해져도 된다고 했다. 정말 그래도 될까? 하는 물음이 잠깐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져 버린다. 따뜻하게 온몸으로 퍼지는 감각이 대답이 되었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걸 알았다. 트라우마와 상처, 방어기제. 온갖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나를 해치기 위한 게 아니라 나를 보호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너무 오래 걸렸다. 지긋지긋하게 생각했던 모든 게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데도…….



‘나는 그래. 단 한 번만이라도 네가 나와 제대로 마주할 수 있길 바랐어. 그게 만약 내 욕심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네가 여기서 벗어나서 행복해질 수 있길 바라.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내가 너를 축복하고 사랑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어.’



너무 오랜 시간 가둬났던 '내'가 마지막으로 '내'게 했던 말만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나는 눈을 조용히 감았다. 아주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몇 번은 더 만나게 되겠지. 그래도 이제 그건 더 이상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겠다. 내가 알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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