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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게 기회였으므로

by 릴랴

누군가의 기대로 가득 찬 시선은 벅차고 힘에 부쳤지만 그 자체로 기회였고 내가 기대할 만한 뭔가가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까닭이라 인과관계를 정리한다. 그건 충족을 시켜도 되고 안 시켜도 그만이다. 기회를 잡기도 하고 놓치기도 하고 특히 실력이 부족해 잡고 싶어도 놓치는 경우가 있다. 후자가 좋은 이유가 있다. 확실하게 내가 이 부분이 그 기회에 닿기에 모자라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문제가 풀리는 원인으로 인식이 있다. 문제를 인식하는 순간 그 사람은 갈수록 바뀐다. 한번 인식한 순간부터 그걸 잘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노력을 하지 않는다 해도 머리 한 구석에는 계속 생각이 난다. 그 문제가 마침내 해결될 때까지. 그 문제가 더 이상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게 될 때 자유로워진다. 후련하게 탈탈 털고 갈 수 있게 되는 감각이었다.


인식을 하지 못한다는 건 그 문제를 내 방식대로 개선하고 바로잡을 기회도 없다는 뜻과 같았다. 우리가 행복한 게 당연하듯이 힘든 상황이 온 것도 그렇게 느끼는 것도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좌절해도 되고 절망해도 된다. 당연히 일어나는 현상에 지나지 않다고 받아들이자.




책을 읽거나 정보를 접한 순간 그 사람의 무언가가 변하고 영향을 받는다고 들었다. 그 사람이 신경 써서 인식했든 그렇지 않든 무의식이 자연스럽게 바뀌고 새로운 정보를 바탕으로 기존의 지식과 뒤섞여 재구성을 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하나하나 배우기 위해 급급해서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있는 정도의 지식은 생성되지 않더라도 자신의 무의식을 바꿀 정도로는 변하기 때문에. 또 하다 보면 인간은 익숙해지는 습성이 있어서 편하게 읽어도 정보가 알아서 머리에 꽂히게 된다. 그때는 좀 더 많은 걸 알 수 있겠지만 무의식의 변화가 먼저였다.



다른 사람의 것을 따라 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 무의식과 내면의 있던 생각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의식하지 않고 뭔가를 할 때 내 내면에서 소화된 나만의 재정립된 정보가 나오고 내가 받은 느낌과 디테일을 말할 수 있게 된다. 그건 정말 진짜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도 알 것이다. 저건 정말 겪었던 내용이다. 깊이 사색해야만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말이 아니라 새롭다라고. 그건 내면에서 소화가 되고 무의식이 급변했을 때 생길 수 있는 감각이라 여겼다.


잘 썼는데 감흥이 안 가는 글이 있고 서툴고 표현이 미흡해서 잘 쓴 글도 아닌 것 같은데 눈길이 가고 한번 더 보게 되는 글이 있었다. 두 가지 모두 써봤으면 한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해서 그렇지만 정말 못 쓴 글도 써봐야 하고 제대로 된 글도 써봐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건 글에서만 한정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다. 너무 심하게 망하거나 큰 일을 당하는 건 지양하지만 적당히는 망해보기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그런 감각을 찍어먹어봐야 한다. 그게 회복탄력성을 키워준다. 그것도 있고 내가 대충 어떤 식으로 하면 망하고 저 사람은 내가 망한 방식을 해도 잘되는데 나한테는 통용이 안되고 나는 이렇게 하면 잘되는데 저 사람은 잘 안되고 이런 걸 대충이나마 익혀두면 좋았다. 일단 내 말이나 다른 사람 말이 무조건 맞지 않다는 걸 마음에 깔아 두고 바라보게 되고 자칫 오만해지거나 맹신하는 실수를 하지 않기 쉽게 된다. 그리고 내가 잘됬지만 저 사람은 내가 말한 방법으로 망할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말하는 방식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전달할지 한번 더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과 못하는 게 점점 명확해지니까 구분해서 쓸 수도 있고 그게 내 특성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판단해서 잘 사용하기에 유용해진다.



예를 들어서 칼로 자르던 걸 공으로 자르려고 시도해 보면 아무리 해도 안 잘린다. 뭉개질 뿐이고 화분을 물컵처럼 물을 담으려고 한다면 밑에 구멍이 있기 때문에 계속 물이 밑으로 샌다. 물을 담을 수 없는 구조였다. 칼이 택배박스를 뜯거나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면 유용해서 매우 좋지만 안 좋게 쓰이면 흉기에 지나지 않고 약도 알맞게 사용하지 않았을 때 독이 되었다. 당장의 사람이 하는 말도 좋게 쓰이면 사람을 살리고 천냥의 빚을 갚지만 나쁘게 쓰이면 누군가를 저격하는 말이 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자신에게 맞으면 아무리 쓰레기 같은 책이어도 도움이 되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말이 적혀있어도 일말의 공감도 되지 않고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이 판단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굳이 안 맞다고 티를 낼 필요는 없지만 단호하게 웃으면서 아니라고 괜찮다고 쳐낼 수 있으면 좋겠지. 만약 내 앞에 있는 좋은 말이 나에게 있어서 칼처럼 느껴진다면 그걸로 굳이 자기를 찌르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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