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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Nov 17. 2018

15- 이천 십일 년쯤 있었던 일

 축하하러 갔던 이천 십일 년의 졸업식이었다. 브로콜리너마저의 <졸업>이란 곡이 내내 흘러나왔다. 축사를 준비해왔던 어떤 아빠가 있었다. 그렇지만 준비해 온 어떤 말도 못 했다. 엄청 울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아빠는 흰 에이포 용지를 든 손과 어깨, 고개, 목소리 모두 들썩이면서 말했다.


“이 미친 세상에서, 행복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 곡은 당부였다. 나도 속으로 애들에게 그렇게 당부했었다.  

동기들이 졸업하던 날이었는데, 내가 자퇴한 지 일 년 뒤였다. 그 학교는 작았다. 이천 년대 초반에 우후죽순 생겨나던 대안학교 중 하나였다. 교복 만을 입어야 한다거나, 머리칼을 어떻게 잘라야 하는지 등의 규정이 없었다. 등수를 매기는 시험 같은 것도.


 마지막 일 년을 앞두고 자퇴했던 이천 십 년에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때 세상을 마주친 기억을 잘 못 잊는다. 대학에 가고자 학원이란 곳에 처음 갔었다. 몰래 나가지 못하게 지켜보는 사람과 카메라가 있었다.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뒀는데, 누가 막대기로 그걸 툭툭 쳤다.

“집어넣어.”

 가져간 책이 몇 권 없어 자습 시간에 할 게 없었다. 엄마한테 이상한 세상에 관해 편질 썼다. 다 쓰고도 시간이 남아 엎드려 잠들었다. 일어나 공부하라고 누가 또 깨웠다. 공부는, 네 개 혹은 다섯 개의 보기 중에 뭐가 맞는지 선택하는 거였다. 답을 맞히는 일이었다. 도무지 그게 왜 공부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 답 맞추기는 나의 등급을 매겨주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답을 맞히다 보면 잘 맞추게 되고 그럼 대학교에 갈 수 있다고 했다. 통제와 공부와 등급은 모두 모욕이었다. 학교 바깥에서 마주친 세상은 배운 것과 다르게 굴러갔다.


 엄만 새벽에 내 편지를 보고 울었다. 그 날부터 학원에 안 갔다. 유치원을 그만둔 때처럼, 그날도 더 이상 내가 다치지 않도록 나를 거기서 데리고 나왔다.


 그냥, 조지아의 침대에서 그 노랠 들었는데 생각이 났다.
모두 그 당부대로 살았으면.


-18.11.2. 조지아, 트빌리시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브로콜리너마저 <졸업>의 가사 中
이 노랜 이런 문장이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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