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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Dec 22. 2018

22- 내가 왜 이러고 사냐면

 십 대 끝무렵부터 아르바이트 노동을 해 왔다. 생계를 위해서 라기보다 눈치 안 보고 돈을 쓰고 싶어서였다. 용돈은 그 쓰임새를 엄마에게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말하는 게 창피했다. 그렇게 최저임금을 모아 자취방 보증금을 마련하거나 여행을 다녀왔다. 술도 마시고 애인에게 선물도 하면서 근근이 먹고살았다.


 내내 여행을 좋아했다. 지평선이 보이는 초원에서 혼자 똥을 싸고 싶어 몽골에 다녀온 적이 있다. 어떤 낭만에 사로잡혀서 그랬다. 모은 돈으로 반구의 하늘 아래서 낮과 밤을 여러 번 보내고 돌아오니 여름이 지나있었다. 깊게 버거웠던 사랑도 같이 지났는지 새로운 연애에 용기를 냈다. 삼 년 전 가을이었다.


 새로 만난 그 사람이랑 세계일주를 하기로 했다. 사랑에 푹 빠져서 애틋한 맘으로 일 년 좀 넘게 지내니 덜컥 대학을 졸업해 버렸다. 약속한 세계일주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카드사 콜센터에 상담사로 입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월급이 세금 포함 200만 원을 밑돌았다. 친절하게 고객의 민원을 해결해주는 게 주 업무였다. 입사 모집 공고엔 그렇게 쓰여 있었지만 결코 그것으로는 노동을 이어갈 수 없었다. 대출을 권유하거나 유료 서비스에 가입시키는 걸 비롯한 여러 기준으로 상담사의 등급을 매기고 급여를 차등 지급했다. 통화 품질을 위해 통화마다 꼭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었는데 그걸 어기면 깜지를 썼다. 한 번은 "아 그러세요"라는 호응어를 놓쳐 에이포 용지 가득 그 말을 적었다. 전산 오류와 내 실수가 겹쳐 연체료 천구백 원가량이 생긴 고객에게 그 돈을 내 통장에서 직접 입금하란 상사의 오더도 있었다. 외에도 업무는 엄청나게 많았다.


 마음이 건조해졌다. 애인과 많은 밤 나눴던 얘긴 중간에 붕 떠버렸다. 같이 사는 사람들을 살펴보자고 했었다. 세계일주는 관광 말고 공동체 기행으로 하자고, 사람들 속에 섞여서 겪어 보자고. 가족끼리만 말고 여럿이서는 어떻게 사는지 알자고 했는데, 그게 몹시 멀었다.


 그 여름 위태로운 출근길에 서울시 감정노동자 무료 심리상담 플래카드를 봤다. 전화를 걸어봤다. 받은 사람은 나와 만나줄 심리상담가였다. "힘드시죠, "라고 했다. 그러자 내가 울었다. 물음이 위로가 되려면 어떻게 물어야 하는지 그때 조금 알았다. 그의 물음들로 연명하면서 퇴직금을 받을 때까지 일했다.


 달력에 가위표를 치면서 그만두는 날이 며칠이나 남았는지 세었다. 모든 고객 응대 서비스직과 작별하고 사랑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야지, 두 번 다시 돌아가지 말아야지 했다.


 통장에 천만 원이 모였다. 애인도 그랬다. 이 돈이면 사랑을 시작한 지 삼일 만에 했던 약속과 육 개월 만에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처음 약속은 세계일주였고 두 번째 약속은 공동체 기행이었다. 신이 났다. 내가 거기 가도 되겠냐고 공동체들에 물을 수 있는 날이 왔다. 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하고 영어 공부도 했다. 들고 갈 랩탑을 사고 세계 지도 위에 여행 루트를 그렸다. 설레고 무서웠다. 여행 때문이기도 했지만 계획을 세우는 마음이 여전히 건조해서 그랬다. 전처럼 촉촉한 마음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전엔 시도 쓸 수 있었는데 이젠 일기 쓰는 것도 버겁다. 무언갈 위해서 죽은 시간을 보내고 끝내 성공한 게 처음이었다. 몹시 별로였다. '일 년만 미치라'거나 '몰두해서 이뤄내라'라고 하는 건 그다지 좋은 권유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뭘 위해서든 마음을 말리고 시간을 부수지 말아야겠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도.


 내 생의 구체적인 계획은 이 여행이 끝이었다. 어떻게 살지는 내내 몰랐어서 여행까지만 염두에 뒀던 거다. 육 개월쯤 여행했는데 여적 그다음 계획은 안 만들었다. 불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은 그저 다독인다. 지금은 마음을 적시면서 사니 다행이라고. 다신 마르게 하지 말자고.


 어쩌면 위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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