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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Dec 31. 2018

23- 말하기 어설플지 몰라도

 오래된 친구랑 기차여행을 간 적이 있다. 나랑 왜 갑자기 여행을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배낭을 쌌다고 그랬다. 청량리역에서 정동진으로 가는 열차 사이칸에 구겨져서 밤을 새웠다. 겨울이었다.


 바다를 따라 일주일을 다녔다. 정동진과 순천과 목포와 진도와 변산반도였다. 동해는 무척 파래서 오래 넋을 놓고 서 있었다. 파도가 제멋대로 첨벙 댔다. 진도까지는 기차가 안 다녀서 버스를 탔다. 팽목항에 가기 위해서였다. 조용히 걸어 큰 노란 리본을 지나 노을에 가까이 갔다. 다른 바다들은 하나같이 엄청 컸는데 그 바다만 조금 작았다. 조용하고 강렬하게 해가 졌다. 하늘에 물든 주황과 분홍이 파도가 닿은 모래사장처럼 촉촉했다. 작게 울었고 오래 슬펐다. 다시 버스가 오길 기다렸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항 중에서는 팽목항이 제일 아름답다고 했다.


 변산에 갔을 땐 밤이었다. 바다 앞에 앉으니 어디부터 하늘이고 어디부터 바다인 지 알 수 없었다. 크고 선명한 달이 하늘에 떴고 물결친 달이 바다에 비쳤다. 그걸로 하늘이랑 바다를 대략 구분할 수 있었다. 내 오랜 친구는 노래를 좋아하는 애여서 블루투스 스피커를 가지고 다녔다. 나는 매달 노래를 들으려고 돈을 내는 애여서 양껏 재생할 수 있었다. 그 애는 여행 내내 전인권이 부른 <걱정 말아요 그대>를 불렀다. 같이 들으려고 스피커로 노랠 틀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고 얘길 주고받으면서 새벽까지 추운 걸 참았다. 몇 년 후에 그 곡을 이적이 불렀는데 대유행했다. 그렇지만 내 귀엔 지나치게 세련되어 부담스러웠다. 세련된 무언가는 자주 그렇다. 그 밤엔 같은 곡을 몇 번 듣다가 각자가 좋아하는 포크 음악을 한 곡씩 재생했다.


 변산의 밤이 떠오를 때가 있다. 도처에 후회만 가득일 때, 시간이 지나치게 빨라서 무서울 때, 아직은 아니지만 후회할 짓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을 때가 그렇다. 꽤 가끔이다. 그 가끔은 요 며칠이다. 충분하지 않았던 내가 밉고 불쌍하다. 그런 의미가 있는 지나간 것들의 의미는 뭘까. 후회 없이 사랑했고 꿈꾸었으면 훌훌 털 수 있는 거라고 위로하지만 글쎄.


 올 해를 어떤 날들로 구성한다면 그저 그런 날에 눈물이 날 만큼 벅차오르던 날을 조금 더하고 화가 나서 몸이 떨리던 날이랑 배고파서 울었던 날이랑 슬퍼서 가슴께가 진하게 무거웠던 날을 더하면 될 거다. 이 중엔 그저 그런 날이 제일 많다. 하루씩 지나와서 십이월 삼십일일에 닿는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건 늘 어설프다. 고맙고 잘 지내자고 인사를 주고받는 것도 왠지 어수선하고 별 일 없이 살다가 갑자기 무언가 돌이켜 보는 것도 어색하다. 괜히 후회하고 싱숭생숭하고 그러다 새해가 된다. 그래도 잘 정리하고 새로 시작해야만 할 것 같아서 여럿에게 인사하고 어설픈 글도 쓰고 그런다. 또 그저 그런 날이 올 텐데도.


 여기 조지아는 새해에 자기 집에서 불꽃놀이를 한다. 저녁엔 그걸 보러 높은 곳에 갈 거다. 

그런 다음 도처의 후회들이 낭만으로 바뀌길 바랄 거다. 변산에서 들었던 곡을 재생하고 곰의 손을 잡으면서.


-18.12.31. 조지아, 트빌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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