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리멀리 Dec 20. 2018

21- 일단은 그러기로

 불안이 시작된 건 얼마 전이었다. 그걸 의식한 건 통장잔고가 천만 원 아래로 내려가면서부터다. 여행이 이렇게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면, 그런 다음 아무것도 안 남는다면. 책을 만들자거나 후원금을 준다는 이들에게 실망을 줘야만 한다면. 벌써 창피해서 사라지고 싶었다. 불안이 심해지고 나서 제일 먼저 한 건 천 달러로 두 달 살기였다. 일단 우리에게 기대한 모두에게 줄 실망을 미룰 수 있는 한 미뤄야 했다. 그러려면 여행이 길어야 하고, 그건 잔고를 유지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실패했다. 화장실이 깨끗한 숙소에서 자면서 맛있는 현지 음식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여름의 끝무렵부터 그랬다. 바라나시에서 어떤 잘 나가는 여행 작가를 만났었다. 내뿜는 에너지가 사교적이고 밝았다. 행복한 여행을 파는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온 밤에 조바심이 많이 묻었다. 나는 그 날, 밤이 짜다고 썼다.


 여행이 여행 값을 해야 할 것 같다. 여행 값이란 게 무엇이냐 하면 내가 이렇게 오래 지구를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쓴 것에 대한 설명이다. 그게 나와 남들을 설득시킬 수 있으면 된다. 나아가 더욱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면 충분한 값일 거다.


 아무것도 안 남아도 지구를 오래 돌아다닌 걸로 됐다고 여겨왔다. 게다가 지금껏 뭘로 먹고살지에 관해 걱정한 적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여행 경비를 위해 일 년간 일했던 콜센터만 아니라면, 그렇게 매일 출퇴근하는 것만 아니라면 될 것 같았다. 당연히 그럴 거라는 생각이 안 변했었다. 나한테 자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게 과정이라는 믿음이었는데 문득 그랬다. 만약 내가 여행 값을 못한다면 다시 거기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버거웠던 건 출퇴근이었는데 그건 도저히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간헐적인 노동보다 규칙적인 노동이 더 할만 하다고 하지만 나는 다른 어떤 사람들에 속해 있어서 간헐적이지 않은 노동에 쉽게 지친다. 그런데 끔찍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사는 동안 출퇴근을 할 수도, 게다가 안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안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 볕이 좋거나 비 오는 날에도 밖에 못 나갔던 일 년에 관한 생각.


 부득이 나는 써야 했다. 써 오던 것보다 훨씬 많이 써서 내보여야 했다. 글 쓰는 일이 나와 그다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왔지만 그건 하나도 안 중요했다. 뭐라도 써서 여행 값을 해내야겠는데 뭐라도 쓰는 건 몹시 어려웠다. 대체 그 '뭐라도'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 탓이다. 어쨌든 해 보기로 했다. 내가 뭐라도 많이 쓴다고 해서 여행의 값이 충분하다고 할 순 없지만 할 줄 아는 것 중에 제일 나은 게 쓰는 거라서 어쩔 수 없다.


 일단은 할 수 있는 걸 했다. 넷플릭스 구독을 취소했다. 게으르게 재밌고 흥미로운 매체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 게 이유다. 방해되는 무엇과 나를 강제적으로 차단하는 걸 모욕적이라고 여겨왔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다음은 매일 비슷한 분량의 글을 쓰기로 했다. 쓰고 읽히는 게 낯선데 지인들의 접근성이 낮은 공간을 찾아 다행이다. 게시하는 것이 조금 안심되었다.


 여행이 끝나는 날이 아득해서 그동안 불안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고 그냥 지금이 연말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어쩌면 주변 사람들이 점점 유명해지거나 돈을 잘 벌기 시작해서와 같은 초라한 이유일지도.


 남에게 말하기 싫은 불안에 관해, 왠지 없어 보이는 여행의 값에 관해 쓰려니 창피하다. 창피하다고 안 쓰는 것보단 덜 창피하고 싶어 쓴다. 그래도 넷플릭스 구독을 취소했으니 장하다. 적어도 콜센터로 돌아가지만 않으면 된다. 여행 값은 그만큼만 치르기로, 일단은 그러기로 하자.


-18.12.19. 조지아, 트빌리시.

매거진의 이전글 20- 부수적인 모두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