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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Jun 17. 2019

25- 까미노 인트로; 어른의 세계

 겁 없이 배낭을 채웠더니 십오 킬로그램이었다. 무겁지 않다 여겼다. 호기롭고 오만하기 때문이었는데, 나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런 채로 피레네 산맥을 향해 걸었다. 그 날 아침에 양치를 하면서 거울을 봤다. 거울에 비친 내 표정엔 들뜬 긴장이 보였다. 처음이 주는 선물 같은 얼굴이었다. 바깥에서 만난 순례자들은 다들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곰은 오늘 마주치는 이들과 오래도록 걷게 된다고 내게 귀띔했다.


 발바닥을 찌르는 산속을 걷자 나는 점점 단순해지기 시작했다. 친구든 사랑이든 모르겠고 지금 아프고 세상은 안 아름다웠다. 화가 차올랐다. 멀찍이서 내 화를 쳐다보니 발이 놓인 곳을 향해 있었다. 약이 바짝 올랐다. 이 마음을 뱉어 내면 내 손해라 그럴 수도 없었다. 볕에 반짝이는 잎과 바람이 내는 소리를 사랑했는데 그 날은 전부 보이지 않았다. 오르막에서는 숨이 찼고 내리막에서는 숨이 막혔다. 땀이 뻘뻘 흘러내렸다. 배낭이 나를 여기 묻으려는 듯 땅으로 잡아끌었다. 길은 자꾸 우릴 속였다. 곰은 자꾸만 속아 넘어가 이번 봉우리가 마지막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안 속는 척했다. 역시 번번이 거짓이었다. 그 속임수에 서러워 조금 울었다. 알베르게(순례자 숙소)에 도착하기 이백 미터 전이었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걷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체력이 좋은 곰은 긴 나무를 주워 지팡이를 만들어 가며 걸었다. 걷는 것 말고도 뭘 할 줄 아는 애였다. 하지만 나는 다른 수가 없었다. 여기서 눕는 대도 걸어야 끝이 나는 산이었다.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는 일을 반복했다. 내 집중의 태였다. 곰은 힘을 내라며 휴대폰으로 지도 어플을 켜 앞으로 몇 미터 남았는지 중계했다. 그 목소리와 걸음에 집중하면서 흙길을 지나 마침내 아스팔트에 도착했다.


 알베르게는 어른의 세계였다. 집이었더라면 곰 혹은 우리 엄마나 아빠가 나를 격려하고 돕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준비해 주었겠지만 여긴 나 아닌 모든 이들이 나 만큼 혹은 나보다 더 힘든 곳이었다. 모두가 순례자인 이상 나는 내 할 일을 남에게 미룰 수 없었다. 티 안 나게 홀로 절망하며 줄을 서고, 돈을 내고, 신을 벗고, 배낭을 들었다. 그래야만 침대를 얻을 수 있었다.


 까미노는 냉정했다. 끊임없이 날 약 올린 길은 말이 없었고 짐은 짐이고 남은 남이었다. 내 일을 온전히 내가 하는 건 무척 낯설고 어려운 어른의 것이었다. 어른일 리 없는 나는 어른처럼 보이는 이들 사이에서 서럽게 온전했다. 다들 아픈 발을 가지고도 웃었다. 나도 웃어야 하는 걸까, 발을 땅에 딛는 일이 이렇게나 힘든데 모두들 어떻게 씩씩한 걸까. 이 어른들과 나는 왜 여기 왔을까.


 앓다가 잠들었다.


-19년 6월, 까미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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