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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Oct 01. 2019

28- 까미노; 사는 게 왜 잔인하냐면

 그런 날이었다. 제각각의 걸음 속도와 이유가 달라 따로일 수밖에 없던, 유난히 짜증 나고 서럽던. 그 전에는 누가 곁에 있기 때문에 견디는 시간이 잦았다. 아무도 없을 땐 누굴 만나기 위해 서둘러 걸었다. 그 날은 통증과 짜증 탓에 누구와 함께 있을 여유와 체력이 없었다. 대책은 혼자일 것뿐이었다. 게다가 꼭 마음먹지 않아도 나와 같이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너무 느리기 때문이었다. 되뇌었다. 아픈 나도 나라고,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게 나라고 말하면서 걸었다.


 지평선을 사방에 두고 걸어, 앞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반구의 하늘이 뚜껑처럼 눈에 들어왔다. 땅과 하늘을 동시에 보면서 입술에 힘을 주고 두 팔에 든 지팡이를 힘껏 밀었다. 그러면 두 걸음을 갈 수 있었다. 이 과정을 한 세트로 놓고 반복하면 도착할 수 있겠지, 힐끗 옆을 봤다. 길을 잘못 들었는지 의심하지 않도록 내 걷는 방향에 노란 화살표가 그려진 전봇대가 있었다. 내내 있던 표시라 다시 앞을 보려는데 화살표 위에 적힌 검은 글자가 보였다.


' Your camino, your way'


 그러니까, 내가 내 길을 가는 거라고. 나만이 걷고 내가 전부 감당해야 할 내 몫이라고. 아무래도 너무하지, 이렇게 못될 줄은 몰랐다. 이보다 더 야속할 수는 없었다. 눈이 세모 모양으로 바뀌었다. 어딜 째려보는지도 모르는 채 계속 째렸다. 인생을 자기가 살아야 한다니 지나치게 잔인했다. 낼 수 있는 힘을 전부 쏟아 걷는 내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제발 나를 봐줬으면 하는 이 조차도 나를 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내가 여기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남 일은 이미 남 일이라고 짚어주는 것 같았다. 


 서 있는 일조차 힘든 와중에 삶을 살고 몫을 해내고 아픔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사는 동안 그런 날이 이어진다는 것이 신물 나고 눈물 나게 미웠다. 눈에서 눈물이 나와 뺨에 툭툭 부딪히고 흘렀다. 바람이 불어 얼굴에 닿아 눈물을 밀어냈다. 그 와중에 주저앉아 쉴 수는 없었다. 쉬면 통증이 더 심해져 다시 걸음을 시작하기 어렵다는 걸 알았다. 긴장한 지팡이를 뒤로 밀며 꾹꾹 걸었다. 나를 뺀 세상 모든 존재와 존재 아닌 모든 것들이 몹시 커졌다. 울음이 입 속에 꽉 차서 입을 크게 벌려야 했다. 배에서 슬픔이 솟구쳐 올라 엉엉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그 날, 혼자 걷기 시작할 즈음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이 무작위로 재생되도록 설정해 두었다. 이렇게 울 줄 모르고 그랬는데 자꾸만 슬픈 가사의 흥겨운 노래가 재생되었다. 예를 들면 <Tell me if you wanna go home> 같은 노래였다. 슬픔이 들리는 흥 따위는 개의치 않고 마음껏 흘렀다.


 오래 울었는데도 숙소까지 수 킬로미터나 남아있었다. 쉰 적도 없는데 도착도 안 해서 울음을 멈추고 걷기만 할 수 있었다. 그다음 걷는 데에 집중했는데, 이 말은 아픈 데에 집중한다는 말과 같았다. 내 뒤에서 나타났다가 내 앞으로 멀어져 사라진 사람들을 몇 명이나 보았을까, 곰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거기 곰이 있었다. 분명 반가웠는데 목구멍에서 울음이 다시 솟아 그에게 안겨 울었다. 그는 좀 마시라며 들고 있던 캔맥주를 따서 내 입으로 기울였다. 몇 모금 넘기니 창피해졌다. 울음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온 주인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내 눈은 더 이상 세모 모양이 아니었다. 반달 모양 눈을 하고 작게 웃으면서 체크인을 하러 갔다. 사람들은 나를 놀리면서 흉내 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조금 웃으려고 했는데 다시 울 것 같아서 그냥, 그냥 있었다. 곰은 내가 운 얘기를 그리겠다며 당장 태블릿을 잡았다. 나는 서둘러 씻었다.


 나를 산다는 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삶은 내가 헤쳐야 만하는 숲이다. 그건 무척이나 무섭고 외로운 일이었다. 나는 계속 살아있었다. 그렇지만 겁이 나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두 내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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