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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Nov 08. 2019

32- 낙타의 발로 걷고 싶어

 각오는 매일 필요하지만 매일 조각난다. 조각을 다시 쓸어 모아도 처음처럼 돌아오지 않는 날이 있다. 걱정이 닥칠 때 주로 그렇다. 일흔 살이 된 나의 생계까지 걱정하게 되는 그런 날. 그런 날에는 절대로 인스타그램에 접속하면 안 되지만 절대적인 것 마냥 자동적으로 인스타그램에 접속한다. 벌써 부자가 된 듯하거나 벌써 행복을 꾸린 듯하거나 벌써 아주 유명해진 듯 한 사람들이 보리굴비 마냥 줄줄이 늘어져 있다. 그 모든 ‘벌써’가 나를 통과하면 나는 착즙 된 과일처럼 구겨져 힘을 잃는다. 무슨 수로 저만큼 빠른 거지, 어떻게 잘 해내는 거지. 게시물이 전부 저들의 진실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하나같이 빛나는걸.


 저들의 속도는 지름길 위에 있어서일까, 내가 느린 까닭은 여기가 지름길이 아니기 때문일까. 이 길이 지름길인지 아닌지 아직 모르는데, 저들이 지름길로 가는지 아닌지도 나는 모른다. 어쩌면 중요한 건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길로 가느냐가 이런 초라한 차이를 만들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내가 느리디 느리고 약하디 약한 두 발만으로 서 있다는 것이었다.


 스페인의 순례길 위에서 겪은 황당함을 기억한다. 걸음으로 꼬박 하루를 가는데 자동차를 타면 십 오분 만에 도착했다. 아무리 굽이길이라도 차를 타기만 하면 그랬다. 지름길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걷는 이들이 바보 같았다. 인간은 자전거도 자동차도 헬리콥터도 심지어 비행기도 만들어 타고 엄청 빨리 다니니까.


 어쨌든 스페인에서는 내 의지로 두 발이었다. 그러나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착즙 되는 지금의 나는 가진 게 두 발뿐이고 걸을 줄 밖에 모른다. 벌써 저만치 간 사람들이 자동차를 탔을지 자전거를 탔을지 그냥 안 쉬고 뛰었을지 모르지만 나보다는 빨랐다. 저들이 어디 있느냐를 생각하는 일은 나를 구겨지게 만들었다. 해롭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급하지 말자고 되뇌었다. 나는 내가 가진 두 발로 서두름도 게으름도 없이 낙타처럼 걷고 싶기 때문이었다. 낙타는 뭐든 물끄러미 보는 편이고 기분이 더러울 때를 제외하면 쉽게 동요하지 않는다. 그러고 싶었다.


 내 배우자 곰은 종종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한다. 자기가 남들보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미안하고, 친구들은 취직해 월급을 받지만 자기는 안 그래서 미안하다고. 곰이 불쌍하다. 군대에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서른이 다 된 것뿐인데 여유로운 시간이 조급한 시간보다 적다. 빠른 것들이 해롭다. 곰은 바쁘게 그림을 그린다. 어젯밤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너를 위해서 그림을 그려. 네가 덜 힘들게 살았으면 하는데 그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림 그리는 일뿐이라서. 네가 출근하고 나는 안 하면 내가 꼭 먼지가 된 기분이야.”


 곰은 내게 생계를 떠넘기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말했었다. 한쪽이 희생하여 뭐라도 짊어지고 살지 않도록 우리 둘이 애쓰자고 약속도 했었다. 나를 위해 바쁘기로 한 곰은 매일 쫓기듯 그림을 그렸고 오늘도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렸다. 나는 주말에만 아르바이트를 해서 일주일에 딱 두 번만 고단한데, 곰은 그 이틀을 마음 아파했다. 불쌍한 곰, 그를 안쓰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무 살과 서른 살 사이가 이십 년이라면 그의 고통이 덜어질까, 십 년은 턱없이 짧았다. 대체 스무 살부터 서른 살까지 무얼 해야 빛날 수 있나. 여름의 나무 같은 시절이라고 했는데 우리 중 누구에게서도 무성한 잎을 찾을 수 없었다.


 별 다른 서두름 없이 일주일에 한 번 참석하는 모임이 있다. 월요일마다 글을 써 가져와 합평하는 모임인데 다섯 명이 함께 한다. 우리 중 벌써 나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할 수 있다. 가진 게 없어서 빠를 수도 없고 다리에 근육도 별로 없어서 웬만큼 걷다 쉬어야 하는 사람들만 모여있다. 그래서 우린 종종 같이 걱정한다. 다져 온 각오도 쉬이 조각나 같이 주워 담곤 한다.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눌 때면 왠지 죄책 없이 늘어질 수 있다. 느린 우리는 위로를, 어쩌면 박수를, 아니라면 연민을 주고받다가 남에게 요구하고 그러면서 산다.


 무성한 시절을 앙상하게 보내는 중이지만 다시 십 년이 지나면 오늘이 무성했다고 기억할까. 아무렴 십 년은 길겠지, 무성해지거나 열매 맺거나 둘 중 하나는 했으면 하는데. 버릇처럼 다시 시간에 기댄다. 지난날 만큼 혹은 보다 더 짧을 나의 십 년이 낙타 같으면 좋겠다. 비록 지름길이 아닐지도 모르고 탈것을 가지지 못한 채 걷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아갔으면. 네 발로 터벅터벅, 나아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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