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가 불러온 위로]
기원전 431년의 복수극이다. 어느 결혼이주여성의 핏빛 복수, 오로지 한 사람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 일어나는 살해들이 펼쳐진다. 메데이아는 이아손과 사랑에 빠져 함께 코린토스로 이주해 아이 둘을 낳고 산다. 그러다 이아손의 외도로 메데이아는 버림받는다. 이아손은 코린토스의 공주와 새로 결혼한다. 그러면서 아이 둘과 메데이아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궁색하게 변명한다. 자식들의 신분을 상승시키고 왕실의 가족으로 만들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들이 쫓겨날 위기에 처했을 때는 별다른 수를 쓰지 않는다. 이아손은 줄곧 기가 막히고 구질구질하다.
공주의 아버지인 크레온 왕은 메데이아와 두 아이를 영토 바깥으로 쫓아내려고 메데이아를 찾아온다. 메데이아는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애원한다. 영리한 그는 하루를 얻어 여럿을 죽인다. 메데이아는 순종을 연기하며 공주에게 독이 묻은 비단옷과 황금관을 선물한다. 공주는 잔인하게 죽고 그를 끌어안은 크레온도 죽는다. 두 아이는 메데이아의 칼에 찔려 죽는다. 공주와 크레온 왕과 두 아이가 죽고 이아손은 산다. 이 복수는 이아손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일이므로 그는 살아남아 고통받는다.
이방인이라서 차별받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나라에서는 추방당한 그의 복수를 나는 이해한다. 저자 에우리피데스는 그의 비참함과 번민과 분노와 슬픔을 깎지 않고 내보인다. 나는 그것들을 읽고 그의 살해를 납득했다. 그는 안 그럴 수도 있었지만 저지를 수도 있었다. 메데이아는 맥베스처럼 야망과 양심이 충돌하여 빚어내는 가여움 같은 걸로 나를 설득하지 않는다. 치밀하고 영리하고 강인한 면모로 복수를 계획하고 실행하고 고통받고 고통을 주면서 고고하게 나를 살펴본다. 이해시킨다.
나는 주로 메데이아를 이해하다가 어쩔 때는 이아손을 이해할 때도 있다. 자식 둘이 죽어버린 그의 슬픔을 느끼면서 아주 잠시 그를 안쓰럽게 여긴다. 하지만 자식 둘이 죽긴 메데이아도 마찬가지다. 자식이 죽은 슬픔으로 고통받는 그 둘은 어떻게 살까. 메데이아는 태양신의 마차를 타고 도망을 갔을까. 이아손은 코린토스에 남아 생을 이어갔을까.
슬픔과 미움과 분노를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다 죽여버리고 만 메데이아의 편에, 신이 선다. 태양신이 그가 떠날 수 있도록 마차를 마련해 준다. 신은 내가 아는 도덕의 편이 아니다. 버림받은 메데이아의 편이다. 기원전 431년에, 신이 아닌 어떤 영리한 인간이 복수를 했다. 신은 그 인간, 그러니까 이방인 여성의 복수를 도왔다. 그러면 도덕은 복수의 반대편에 있었을까. 알 수 없다. 극의 주인공들은 몹시도 인간이어서, 무엇이 정의 혹은 도덕 일지는 별로 안 중요하다. 단지 감정들만이 휘몰아친다.
마지막 대사에서 코러스는 이 모든 일이 신의 뜻이라고 말한다. 기원전 431년에도 지금에도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본다. 신은 정말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도록 해 두고 그저 신의 뜻이려니, 하기를 바라는 걸까. 나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본다. 어쩌면 태양신은 메데이아의 복수를 도운 것이 아니라 그저 메데이아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슬픔과 환멸과 분노를 강렬하게 드러낼 때 그를 마음 아프게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을까. 아무도 편들어 주지 않는 메데이아의 편에 서 주고 싶어서 마차를 마련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해당하면서 고통받고, 살해하면서 고통받고, 모두를 잃고 고통받는 이 비극이 신의 뜻은 아니었을 거다.
잔인하고 잔인한 핏빛의 복수극을 읽으면서 나는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