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손길이 닿아, 비로소 피어났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by 수풀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시인, 꽃 中 -


오래전 국어 교과서에서 봤던 이 시를 다시 떠올리게 만든 건, 흑백요리사 2의 한 장면이었다.

"무한 요리 지옥, 이번 요리의 재료는 바로 '당근'입니다!"

TOP 7 경연 미션이 공개되자 장내는 술렁이고, 쉐프들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당근이란 한국인에게 어떤 존재인가. 반찬, 잡채, 전골 등에 예쁜 색감을 추가하기 위해 조금씩 넣는 정도. 그나마 서양에는 당근이 주재료인 당근라페, 당근 케이크 등이 있다지만, 한국에서 당근이 주인공인 요리는 없다.

그런 당근을 가지고 한 번도 아닌,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요리 대결을 계속 하라니. 심지어 심사위원조차도 당근이 메인인 요리가 많지 않음을 처음부터 시인했다. 마침 우리 집에도 남편이 사온 구좌 흙 당근이 한 박스나 있었다. 이걸 생으로 잘라 먹고 구워 먹어도 일년 내내 못 먹을 것 같아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나는 과연 쉐프들이 어떤 음식을 만들까 궁금한 마음으로 경연을 지켜봤다.


"쉐프님, 지금 어떤 요리 만들고 계시나요??"

"당근으로 만든 당근입니다."

당근즙을 섞어 만든 밀가루 반죽 속에 팥 앙금을 넣고 당근 모양으로 아기자기 빚어낸 디저트, 당근 본연의 맛이 극대화된 당근 샐러드, 당근잎 페스토가 곁들여진 수제비까지. 몇 차례나 계속된 경연에서는 기존에 보지도, 생각지도 못한 당근 음식들이 계속 만들어졌다. 누군가의 탈락을 슬퍼할 틈도 없이, 30분 타이머가 다시 울리면 새로운 요리들을 떠올리고 손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들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넋놓고 감탄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 쉐프들은 수많은 요리를 먹어보고 직접 해봤을텐데, 당근만 이렇게 들여다본 적이 있었을까. 당근의 특성을 분석하고 어떻게 해야 가장 맛이 잘 나올 것인지 궁리한 경험은 아마 처음 아니었을까.

그날의 당근은 난생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제대로 대접받고 있었을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서 나온 것처럼, 쉐프들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비로소 당근은 멋진 요리로 탄생한 것이다.


비슷한 경험이 내게도 있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의 회식을 했던 날이었는데, MZ 신입사원이 회사 근처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우리 회사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게, 분위기도 좋고 요즘 말로 힙한(?) 곳이었다. 그곳의 메뉴는 조금 특별한 데가 있었는데, 유기농 채소와 과일을 주로 한 이탈리안 식이었다. 한참의 기다림 끝에 처음 나온 코스 전채 음식은 바로 아스파라거스 요리. 구운 아스파라거스 위에 크림 소스와 아스파라거스 잎, 튀긴 뿌리 채소와 말린 과일 등이 장식되어 있었다.

"우와, 너무 예쁘다. 이거 아까워서 어떻게 먹지?"

아스파라거스를 스테이크 옆에 나오는 음식으로밖에 생각 못했는데, 한 접시에 이렇게 꽉 차게 나오니 무언가 다르게 느껴졌다. 게다가 맨 위에 쪽빛과 노란빛의 꽃잎까지 뿌려져 있어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아스파라거스가 이렇게 훌륭한 메인 요리가 될 수 있음을 몸소 먹고 느낀 시간이었다.


바닷가에서 버려졌던 생선인 아귀를 매콤하게 볶아내 만든 아귀찜.

원래 쓴맛이 강해 그냥은 도저히 먹을 수 없던 열매이던 올리브로 짜낸 올리브유. 도축 후 남은 부산품 취급을 받던 곱창까지. 누군가의 발견으로, 수없이 반복된 시도로, 천대받던 재료들은 요리로 탈바꿈했다. 숨겨진 가치를 발견해준 누군가의 시선과 노력 덕분에, 세상에서 가치를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귀한 손길이 닿자 꽃으로 활짝 피어난 것이다.

비단 음식 재료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나를 먼저 알아봐준 선배, 가능성을 믿고 기회를 건넨 상사, 내가 미처 몰랐던 장점을 말해준 동료. 그 한마디, 그 한 번의 시선이 쌓이고 쌓여 내 인생을 한 송이 꽃으로 만들어 주었을지도.

누군가 나를 귀하게 다뤄준 그 마음 덕택으로, 나는 조금 더 특별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보다. 그리고 이제는 나도 누군가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 그런 손길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냉장고 한구석에 잠들어 있는 당근처럼, 아직 꺼내지 못한 나의 가능성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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