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하지 않은 미식가들의 로컬 맛집 탐방기
후지산을 품은 일본 소도시, 시즈오카.
작년 말 오랜만에 휴가를 내고 가족 여행을 떠났다. 남편이 이곳을 고른 유일한 이유는 후지산이었건만, 야속하게도 짙은 구름에 가려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여행 내내 비가 퍼부어 밖을 돌아다니기 힘들었다. 영화관도 없고 마트도 없는 후지산 근처 산골 마을. 꼼짝없이 숙소에만 갇혀 있는 우리를 위로해준 건, 다름 아닌 맛있는 음식들이었다.
이곳은 일본에서도 손꼽힌다는 해산물 천국. 숙소에서 제공되는 식사에는 신선한 회가 빠지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평소 구경하기도 힘든 생물 참치와, 구운 연어, 처음 맛본 생 멸치, 생 새우와 대게찜, 처음 보는 이름 모를 작은 생선까지. 비단 숙소 뿐만 아니라, 시장에서 사먹은 일종의 회 덮밥인 카이센동에도 예쁜 색감의 다양한 해산물이 차고 넘치게 올려져 있었다.
바다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에 환장하는 나는, 매 끼니마다 행복한 탄성을 내뱉곤 했다.
"도저히 안되겠다. 오늘은 제발 고기 먹자."
그렇게 삼사일 남짓 시간이 흘렀을까. 남편은 결국 참지 못하고 고기를 먹으러 가자 말했다. 육식파인 남편에게, 고기 없는 밥상은 견디기 힘들었나보다. 우리 가족은 그 길로 숙소 근처 야키니쿠 집을 찾아 나섰다. 야키니쿠란, 한국식 불고기 문화가 일본에 전파되어 자리 잡은 '구워먹는 고기'를 일컫는다. 아직 야키니쿠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에서 그 장면이 나올 때마다 군침을 흘렸다. 주인공 혼자서도 어찌나 맛있게 고기를 구워 먹던지. 언젠가 나도 꼭 그곳에 가보리라 결심했었다.
드르륵, 옆으로 열리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간 식당은은, 고독한 미식가에서 봤던 분위기와 비슷했다. 나무 의자와 테이블 몇 개가 놓여진 작고 아담한 가게.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랏샤이마세! (어서오세요)"
젊은 주인 부부는 힘차게 인사를 하며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AI로 번역을 했는데, 당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접시가 몇 g이나 되는지, 생고기인지 양념인지조차도. 영어에는 젬병인 주인과, 일본어를 하나도 못하는 우리는 손짓발짓으로 소통하며 주문을 이어갔다.
그렇게 어렵게 주문한 고기가 나오고 나서, 우리는 잠시 충격에 빠졌다.
1차 충격은, 너무나도 적은 양의 고기. 한 접시가 1인분일거라 짐작하며 시켰지만, 정말 몇 지름 안되는 고기가 올려져 있었다. 게다가 막상 고기를 굽다보니, 그 적은 양의 고기가 불판에 채 올라가지도 않았다. 불판 크기가 우리집 28cm 후라이팬보다 작다면 과장이려나.
그제야 고독한 미식가 주인공이 혼자 고깃집에 와서 먹어도, 전혀 이질감이 들지 않았던 이유가 납득되었다. 한국에서 고기란 무릇 여럿이 둘러 앉아 푸짐하게 시켜놓고 배를 두드리며 먹는 메뉴지만, 일본에서는 아니었나보다. 한 점씩 천천히 구워, 맛을 음미하며 먹는 음식이었던 것이다. 전혀 고독하지 않았던 우리 가족은, 이 문화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때 마침 퇴근을 마친 직장인들이 하나둘 가게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직 배가 반도 차지 않은 우리는, 그들이 시킨 메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똑같은 메뉴로 달라고 주문했다. 그들을 따라했더니 역시나. 잘 모를 때는 현지인을 따라하는 게 최고다. 비록 무슨 부위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곱게 손질되어 반지르르한 양념이 입혀진 고기는 우리 입맛에도 딱 맞았다. 그들이 새로운 음식을 시킬 때마다, 우리도 모르게 손을 들고 있었다. 똑같은 것 달라고 외치며.
사실 내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고기를 굽고 먹기 바빴지만, 눈과 귀는 우리 테이블을 둘러싼 직장인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우리 가족 빼고는 모두 정장을 입고 가방을 맨 샐러리맨 뿐이었다. 그들은 무엇을 먹고, 무슨 얘기를 할까, 또 쓸데없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우리나라 직장인처럼 김부장 욕을 하면서 고기를 씹으려나. 맥주는 원샷을 하려나. 저 작은 불판에 4명이 앉으면 고기를 몇 접시나 구워먹을 수 있으려나 등등. 혼자 와서 조용히 고기만 먹고 나간 사람도 있었고, 여럿이 둘러 앉아 건배를 외치며 즐겁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어를 몰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잔을 들고 있는 표정과 고기를 굽는 속도만으로도 그날의 기분쯤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독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던 한 사람을 보며, 이런 상상도 해봤다. 혹시 저 사람은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말로는 하지 못한 생각들을, 고기를 구우며 생맥주를 마시는 동안 조금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우리에게 그저 맛있는 동네 고기집이었던 그곳은, 직장인들에게는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으리라. 그렇게 먹고 마시고 나면,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씻겨 내려가 다음 날을 견디게 해줄 것이다.
일본 직장인들 사이에서 고기 굽던 밤.
일본 직장인들의 현지 문화를, 식당에서 체험하는 느낌이었다. 숙소로 돌아가기 아쉬워, 그들이 주문한 녹차 하이볼을 시켜 홀짝였다. 뜨거운 불판 앞에서 빨갛게 익은 얼굴로, 우리도 그들처럼 하루를 마무리해본다. 고단했던 하루를, 맛있는 고기로 위로 받는 느낌. 한 잔의 술에 피로가 싹 씻기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말도 안 통하는 다른 나라의 퇴근 풍경 속에 앉아 있자니, 휴가를 내고 온 여행이 더 감사하게 느껴졌다.
친절한 주인장 내외의 배웅을 받으며 나오는 길, 차가운 겨울 공기를 환히 비추는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아마도 나는 이 풍경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