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풀림 Jan 23. 2024

가슴 철렁한 팀원의 이메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퇴사를 하루 앞둔 동료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오는 엘리베이터 안.

나는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이메일을 체크하다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경험을 했다.


"지난 시간 동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제목의 메일 발신자는, 팀에서 나와 가장 오랫동안 합을 맞춘 팀원 S였다.


'아니, 오전까지만 해도 나랑 웃으면서 얘기했는데. 이게 무슨 소리지? 왜 갑자기 그만둔다는 말을 이메일로 하지?'

 

1분 남짓한 엘리베이터에서의 시간은 영겁처럼 느껴졌고, 내 머릿속은 온갖 상상과 추측으로 뒤엉켜 복잡하기만 했다. 

'방금 퇴사자와 밥 먹고 왔는데, 내가 지금 남 퇴사 걱정할 게 아니었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자리로 돌아와 이메일의 내용을 읽어보려고 했는데, 이 날따라 훼방꾼들이 계속 생겨 결국 3시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들은 다양한 업무와 이슈들로 진지하게 나와 논의하기를 원했지만, 사실 나는 그들의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한시라도 빨리 S의 이메일을 읽어볼 수 있기만을 기다렸다.




미팅도, 면담도 다 끝나고 하늘이 어둑어둑해진 시간, 나는 자리에 앉아 누가 볼세라 몰래 모니터를 가리고 S의 이메일을 읽어 내려갔다.

맨 정신에 이 이메일을 볼 자신이 없어, 심호흡을 백만 번쯤하고 술 대신 에너지 드링크를 삼키며 봤다.


천만 다행히도 S의 이메일은 퇴사 메시지가 아닌, 진심이 담긴 감사의 표현이었다.

입사 3주년을 맞아 많은 생각이 들었고 나에게 감사했다는 팀원의 고백은, 쿵 내려앉았던 내 심장을 다시 따뜻하고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주었다.


팀원의 이메일을 읽으며 지옥과 천국 모두를 경험했던 이 날의 감정과 생각의 흐름을 아래처럼 정리해 본다.


1. S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 

'그동안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라는 이메일은 보통 퇴사자들이 마지막 근무일에 동료에게 보내는 단골 이메일 제목이다.

바로 내가 철렁했던 대목이었다. 팀원에게 이런 제목의 메시지를 받는다고 상상해 보자.... 게다가 나랑 오전까지 미팅을 하며 진지한 업무 얘기와 사적인 농담까지 주고받던 팀원에게 말이다.


사실 우리 회사는 워낙 변화가 빨라 조직개편이 잦은 편인데, 3년을 함께 일했다면 옆 팀장님이 장수 팀이라고 부러워할 정도이다. 그만큼 S와는 오랫동안 관계를 형성하고 업무도 진지하게 논의하던 사이라 그 충격이 더 컸다.


그리고 MBTI - T성향(감정이 아닌 사고)을 가진 나는 이메일 제목만 읽고는, 'S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모든 에너지가 쏠렸다. 빨리 퇴사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 초조한데, 반면 머리는 잘 안 굴러갔다.


S가 없는 우리 팀은, 나에게는 정말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2. 나에 대한 깨달음과 팀원에 대한 감사함 

S와 몇 달 전 1:1 미팅을 하는데, 대화 도중 본인의 커리어 패스에 대한 고민을 슬쩍 내비쳤다.

나는 S가 얼마나 일에 진심이고 진지한지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next career까지 사실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입사 후 업무의 적응기를 거쳐, 지금은 회사의 방향성과 본인의 강점을 잘 살린 업무를 척척 해내고 있는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일에서 성장욕구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업무가 익숙해지는 이 전성기에, 나의 발전을 위한 다음 업무까지 생각한다. 어떤 업무를 맡으면, 혹은 어떤 포지션으로 가면 나에게 배울 점이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새로움에 도전한다.


팀원의 고민을 듣고 나니, 내가 고인 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을 위해 next career에 도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일이 많아 바쁘다는 핑계로 직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S로부터 시작된 고민은, '내가 정말 원하는 직업은 무엇인가'라는 나의 생각으로 이어져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나는 S를 위해, 나의 올드한 생각과 경험을 나누는 대신 책을 한 권 선물했다.

최인아 책방 대표님의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라는 책으로 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네가 고민한 만큼 성장할 것이라고. 너는 너만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사실 자기 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 팀원이라 망설였는데, 다행히도 S는 책을 읽고 업무에 대한 확신과 격려를 받은 것 같아 행복한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하며 감사하다는 이메일까지 써주었다.

지난 3년간 나와 함께한 시간을 회고하는 S의 이메일을 읽으며, 나에게도 그 진심 어린 감사함이 전해져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사실 내가 그녀에게 받은 것이 더 많았고, 내가 더 감사할 것이 많았다.

내가 글을 쓰는 사실을 S에게는 알리지 않아 아마도 이 글을 읽지 못하겠지만, 내가 받은 감동의 포인트와 감사함을 손 편지로 꼭 전달해 봐야겠다 결심해 본다.


3. 있을 때 잘하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나는 이번 이메일 해프닝으로, 이 속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소를 잃기 전에 외양간을 뜯어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외양간의 형태야 여러 가지가 있을 있겠지만, 내가 쉽게 손을 없는 복지나 연봉, 조직문화가 아닌 팀장으로서 내가 있는 것들부터 말이다.


우선 내가 가진 생각들을 내려놓고, 팀원들의 생각을 더 많이 들어봐야지.

이게 가장 쉽지 않은 부분이다. 팀원들과 대화할 때마다 계속 내 생각과 판단이 올라와서 대화가 중단된 적이 있는데, 끊임없이 나의 잘못을 알아차리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그리고 마이크로매니지하고 싶은 나의 마음을 꼭꼭 속으로만 간직하며, 그들에게 더 믿음을 가지고 나도 믿음을 주어야겠다 다짐해본다.




이번 이메일로 나는 큰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대하지 않으면, 떠나고 나서 엄청나게 후회할 것이라는 경각심 말이다.

그리고 존재 자체로도 감사한 사람들에게, 지금 감사함을 표현해야 삶에서 후회가 더 줄어들 것이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나를 믿고 나와 함께해준 모든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진심의 감사를 전해본다.


#글루틴 #팀라이트

 











매거진의 이전글 금쪽이는 과연 팀장인가 팀원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