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에게 들은 나의 미래
양가 부모님들을 찾아뵙느냐 제법 촘촘하게 짜여 있는 5월의 연휴 일정,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새로운 것을 해봤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에게 나의 운명 물어보기.
종교도 없고 미신도 잘 믿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은 오롯이 나 자신밖에 없다는 조금은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번아웃을 겪으며 너무 힘들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졌다. 나의 노력만으로 잘 풀리지 않는 이 상황에 대한 극복 방법을 알고 싶었다.
엄마의 초등학교 동창 아저씨는 신문기자로 일하다 그만두시고 지금은 지역에서 철학관을 운영하신다. 마치 운명의 부름처럼 15년 전부터 성명학과 명리학의 세계에 입문해 나름 입소문으로 유명해진 것 같다.
아저씨가 이제 막 이름 공부를 시작하던 시절부터 친한 친구인 엄마에게는 무료 상담을 해주시곤 했다. 그때 내 이름이 안 좋다고 엄마는 요상한 이름을 들고 와 나에게 개명하라고 한 적도 있었다.
나는 한자만 바꾸는 걸로 끝나긴 했지만 당시에는 엄마의 친구와 친척들, 나의 친구까지 아저씨 덕분에 개명 붐(?)이 불었더랬다.
고향에 내려간 김에 엄마와 함께 빵을 사들고 아저씨의 일터로 찾아갔다. 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 물어볼 요량이었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미래를 살짝 내다보고 싶었다.
잠깐의 근황토크를 마친 후 자연스레 생년월일시를 받아 적고는 물어보신다.
"딸내미는 뭐가 궁금한가?"
사실 딱 하나만 궁금했기에 이렇게 대답 겸 질문을 했다.
"저는 앞으로 뭘 하고 먹고 살 운명인가요?"
그렇다. 나는 정말로 일에 진지하기 짝이 없다. 커리어가 내 머릿속의 팔 할을 차지하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닌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한 일을 찾고 싶었다.
일에서 의미와 재미 두 가지를 다 찾는다면, 내 인생 잘 살아냈다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저씨가 내 사정을 조금 더 이해하실 수 있도록 배경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하는 일에서 번아웃이 왔고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당장 그만두고 이직을 하거나 공부를 해볼까 고민 중이라고.
아저씨는 내 얘기를 듣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대답하셨다. 지금은 힘든 시기가 찾아온 것뿐이고 이 시기를 조용히 버티다 보면 조금씩 괜찮아질 것이라고.
꽉 막힌 고속도로가 답답해 샛길로 빠졌다가 그 길이 비포장길이거나 낭떠러지 길일 수 있다는 비유를 덧붙이신다. 지금 회사를 그만두면 더 큰 후회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을 듣는 순간의 나의 심정을 복기하자면 한마디로 '절망' 그 자체였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고 눈물을 찔끔 흘린 것도 같다.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어 버렸다.
어쩌면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지금 회사는 너와 맞지 않으니 그만두고 네가 생각했던 그 길을 가봐도 괜찮아' 였는지 모르겠다. 내가 머릿속으로 내 길이라고 상상했던 그 길에 대한 확신을 사주풀이로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조금이라도 줄여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내 속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계속 예시를 들어 설명을 추가하신다. 유명인 누구누구와 얼마 전 사주를 보러 왔던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이상하게도 듣다 보니 마음이 조금씩 변하는 게 느껴진다. 절망에서 체념으로, 그리고 마침내 수용으로...
그래, 어차피 이렇게 태어난 것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겠다 생각했다.
아니, 여기에서 더 나아가 괴로움을 이겨내고 나를 성장시킬 방법에 대해 아저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나에게 추천해 주신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예술활동 하기'이다.
일에서 온 번아웃으로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라면, 취미활동으로 그 에너지를 다시 채워야 된다고 하신다.
사실 일이 바빠서 번아웃이 온 건데 언제 취미를 즐기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듣고 있는데, 아저씨는 신신당부하신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라고. 나를 위해 건강한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듯이, 내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취미를 즐기라고 말씀하셨다.
아유, 뜨끔해라.
이쯤 되니 내가 사주를 보러 간 건지 인생 교훈을 얻으러 간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사주에 예술이 있어, 예술을 접하는 활동을 많이 해야 활력을 찾을 수 있다고 하셨다. 이 말을 듣는데 간사하게도 내가 쓰는 글이 생각났다. 지금 글을 조금씩 쓰고 있으니 이것도 예술이라 우겨보고 싶은 마음.
그러다가 나는 원래 음악과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새삼 생각났다. 조금만 시간을 내면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 에너지를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내 운명을 짠~~ 하고 예측해 주길 바랐던 내 사심은, 아저씨의 진심 어린 조언으로 끝이 났다. 듣기 싫은 쓴소리를 듣는데 이상하게도 묘한 위안을 받았다.
그래, 내 인생을 누구한테 맡긴단 말인가. 결국 내가 일구고 가꿔야 할 나의 길인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원한다면, 지금부터 그 방향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5년, 10년 후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게 지금 인생을 살아야겠다 결심해 본다.
아참, 여담으로 아저씨가 해주신 이야기에 따르면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이라도 당연히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더 나은 삶의 핵심은 '긍정'과 '웃음'이라는 옛 중국 이야기도 덧붙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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