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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Jun 03. 2024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일 부심

이것만은 절대 포기 못해!

한 명의 팀원이 지난주를 마지막으로 우리 부서를 떠나 다른 부서로 이동했다. 아쉬운 마음과는 별개로 그 팀원이 하던 일은 다른 사람의 몫이 되어 고스란히 남는다. 아직 새로운 팀원을 뽑지 못한 상태로 기존 팀원들이 모든 인수인계를 받았다. 

신입사원이 오기 전까지 앞으로 어떻게 업무를 나누고 앞으로 우리 팀을 운영하면 좋을지에 대해, 남은 팀원들과 회의를 했다. 여러 가지 업무 중 주간보고 작성 자체가 시간과 노력이 오래 걸리는 것 같아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연초 새로운 리더가 왔을 때 나름 체계 있어 보이려고 만든 템플릿인데 작성하다 보니 부담이 되는 것 같다고. 그 리더분은 두 달도 안 돼 퇴사했지만 그렇다고 주간 보고를 안 할 수도 없어,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봤다.


팀원들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새로운 플랫폼을 사용해 편리하지만 조금 더 그럴듯해 보이게끔 만들자는 의견, 다른 부서와 동일한 양식을 사용하자는 의견, 내용을 줄이자는 의견 등등.

그중 우리 팀에 들어온 지 가장 얼마 안 된 팀원이 다른 의견을 냈다. 

"그냥 템플릿 자체를 없애고 심플하게 텍스트만 워드 파일 혹은 이메일에 적는 건 어떨까요?"

사실 회의의 원래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답변이었다. 작성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을 줄이고 주간 보고 내용 자체에 충실하자는 답변.

하지만 답변을 듣자마자 나와 다른 팀원 명은 "안돼!"를 외쳤다. 다른 사람들이 당황하는 같아 나는 여기에 설명을 덧붙였다.

"아니, 마케팅하는 사람으로서 부심이 있는데, 그렇게 글자만 내보낼 거면 아예 주간보고를 안 하죠."

그렇다. 우리 팀의 주간보고가 다른 팀과 차별화된 외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템플릿이었다. 템플릿은 우리 팀에서 가장 오래 일한 팀원이, 뉴스레터 형태에 이미지를 삽입하고 핵심을 요약해서 한눈에 들어오도록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다. 

다른 팀은 한 주간 있었던 일 중 중요 사항을 요약해서 적는 것이 목표였지만, 우리 팀의 주간보고는 조금 달랐다. 마케팅팀에서 무엇을 했는지보다는 주요 마케팅 캠페인이나 프로모션 하는 제품을 콘텐츠로 내보내기도 하고, 모든 팀의 동참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 한 번 더 강조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내부 직원용 뉴스레터였달까. 콘텐츠는 마케팅 관련 내용들이고... 그래서 글자만 나열해서는 아무도 안 보기 때문에 이미지와 템플릿을 더 신경 쓴 것도 있다. 다른 팀들은 잘 몰랐겠지만 엄청난 설계를 통해 만든 템플릿이었다고!!!


민망한 마음에 장황하게 주간 보고 템플릿과 콘텐츠의 탄생사를 길게 들려주었다. 마지막에 의견을 냈던 팀원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한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마케팅 부심이 있는지 몰랐다고 농담을 던진다. 남들에겐 별 거 아니겠지만, 마지막 남은 마케팅팀의 자존심이 바로 이 템플릿이라고 나도 받아쳤다. 

이 외에도 마케터로서 절대 참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덧붙이며 말이다. 예를 들어 PPT 슬라이드에 쓰여 있는 명조체라던지, 컬러 코드를 무시한 이미지 배치라던지, 줄 바꿈 안된 문장들이라던지 등등. 마케팅팀이 디자인을 하는 부서는 아니지만 남들이 무심히 넘기는 이런 것들이 브랜딩의 기본 사항이라고 우기고 싶었다. (사실 그럴 수 있지만 모두 인정하는 건 아니더라)

내가 먼저 뜬금없는 마케팅 부심에 대해 고백을 하자 다른 팀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만의 '부심' 고백을 이어갔다. 내가 괜찮다고 최종 컨펌을 해도 끊임없이 더 나은 자료로 제출일까지 수정하는 팀원들이다. 그 어찌 자신만의 일에 대한 기준과 부심이 없으리랴.


사실 나는 일에 대한 부심을 거의 놓고 살았다고 생각했다. 일보다는 주변 환경에 의해 많이 흔들리는 자리라 그랬던 것 같고, 같은 일을 한 지 오래돼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깟 주간보고가 뭐라고, 신입 팀원의 한 마디에 이렇게까지 발끈한걸 보니 잠시 잊었던 것이지 내 마음속에는 아직 살아 있었나 보다. 다른 부서 사람들이 보면 참 어이없다고 할 대화였을 것이다. 나조차도 그놈의 부심만 없었더라면 그냥 넘어갔을 작은 것일 텐데 말이다. 

부심(負心) :  어떠한 것에 대하여 그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


어찌 보면 사소하고 어찌 보면 또 이것만큼 중요한 게 있나 싶은 게 바로 자신의 일에 대한 부심인 것 같다. 이건 직업의 종류나 경력과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단골 미용실에 두 달 만에 찾아가면 원장님이 우선 한숨부터 쉬신다. 심호흡 후 평상시에 머릿결 관리한 거 맞냐고 물어보시고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모기만 한 목소리로 "예니오"로 대답한다. 그때부터 원장님의 머릿결 관리에 대한 안타까움 섞인 잔소리가 시작된다. 얼마나 내가 답답하면 그러실까 싶기도 하고 이 분은 자신의 일에 대해 그야말로 'professional'해서 좋다는 생각도 든다. 미용업에 대한 부심이 없었더라면 나한테 이렇게 귀찮게 잔소리도 안 했을 거니 말이다.


며칠 걸려 어렵게 구운 도자기를 바로 깨부수는 공예가와,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숙련된 작업자들. 모두 일에 대한 부심이 엄청난 분들이다. 그리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런 분들에게 끌린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깨닫는다.


완벽주의는 나의 정신을 피곤하게 만들지만, 장인정신은 나의 일을 보다 전문적으로 만들 수 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던 '부심'을 잃지 말자. 아니, 나만의 전문 영역을 만들어 그 부심을 조금 더 탄탄하게 만들어보자.


그나저나 이 글의 존재를 전혀 모를 나의 팀원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고 싶다. 

"자료 내가 봐도 괜찮으니, 그만 좀 고치자! 최종 컨펌 해주고 싶다고!"

더 나은 자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이 존경스럽고, 감사하다. (그렇지만 그정도만 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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