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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Jun 10. 2024

상사 기분 측정기라도 만들어야 하나

내가 절대 닮고 싶지 않은 상사의 모습

사장님과 회의가 있는 날이면 항상 하나의 의식처럼 거쳐가는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사장실 앞 비서실. 회의 10분 전 빼먹지 않고 비서분께 오늘의 날씨를 묻는다. 

"오늘 사장님 기분 어때요?"

날씨는 시시 때때로 바뀌기 때문에 꼭 현재 기점으로 다시 확인해야 한다. 오전에는 햇살이 가득 내리쬐다가 갑자기 오후 1시부터 소나기가 퍼붓기도 하니 말이다. 유독 열정이 넘쳐 감정으로 흐르고 하는 사장님의 기분 확인은, 사장님과 만나는 모든 직원이라면 본능적으로 하는 일종의 '살아남기 위한' 행동이다.


회사를 다니며 많은 기분파 동료들을 만나왔다 생각했다. 지킬 앤 하이드처럼 한없이 친절했다가 갑자기 돌변하는 사람도 있었고상대방의 한 마디에 열받아서 퇴사한 사람도 있었다. 감정이란 누구에게나 있고 그대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뭐든지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이다. 하루의 반을 회사에서 보내면서 상대방의 기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특히나 부정적인 기분들은 보이지 않게 전염되고 심지어 업무 생산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감정 기복을 지나치게 부정적인 방법으로 드러내는 동료들은 무의식적으로 피해왔던 것 같다. 


게다가 동료가 아니라 상사가 기분파라면? 이건 조금 다른 문제이다.

사장님의 예시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어떤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장님의 기분이 저기압인 경우, 그날 회의 주제에 상관없이 일단 혼날 각오를 하고 회의실에 들어가야 한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짜인 기획안을 가져왔더라도 깨질 수 있다. 가끔은 백만 년 전에 잘못했던 일까지 회자되어, 한꺼번에 싸잡아 혼나기도 한다. 

이런 날은 회의를 하다가 과연 내가 무엇을 위해 이 회의에 소집되었나 싶어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생긴다. 그리고 사장님의 기분을 언짢게 한 요소가 무엇인지 속으로 생각한다. 그 요소는 지뢰와도 같아 하나라도 건드리면 대폭발 수준으로 터질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유추하여 조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건 지금 내가 말하려는 주제와 사장님의 기분의 상관관계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상관관계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지 모르겠다.


사장님의 언짢음이 극에 달한 날은 재떨이만 안 날아갔지 분위기는 살벌 그 자체이다. 사장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흥분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얹고 소리를 지른다. 이따위로 할 거면 하지 말라고.

처음에는 살짝 내가 잘못했나 하고 반성을 하려던 마음도 이쯤 되면 자포자기 심정이 된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않으면 내 정신건강에 심각한 손상을 입을 수 있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이 반응은 오늘의 회의 주제와는 상관없어 보인다. 사장님이 이따위라고 표현한 자료는 지난번 피드백을 받고 엄청나게 수정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날에는 보고용으로 준비한 자료는 슬라이드 2번에서 막힌 상태로 잔소리만 듣다가 끝난다. 다시 만드는 수밖에 없다. 젠장. 어떻게 개선할 방향성이라도 주면 좋을 텐데 기분이 안 좋은 날에는 그 방향성을 묻기도 무서워 속으로만 삼킨다. '아니, 지난번에 알려주신 대로 했는데 다시 해오라니, 어떻게 해오면 될까요오오오오오~~~~~~~~'.


대로 별로 흔하지 않은, 사장님의 기분이 구름 없는 맑은 날일 경우에는 무슨 일을 해도 좋은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시간이 없어 평소보다 대충 만든 보고서도 이런 날에는 무사통과이다. 심지어 칭찬도 해주신다. 어쩜 일을 이렇게 잘하냐고, 참 든든하다고.

사장님으로부터 긍정의 단어를 들을 때면 이게 정말 진심일까 계속 생각한다. 그리고 욕을 먹을 때보다 더 등골이 서늘해지고 무서워진다. 이 평화가 언제까지 갈지, 언제 다른 모습으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하지만 본능적으로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된다는 생각에 머리가 획획 굴러간다. 평소 두려워 감히 꺼내지도 못했던 제안들을 막 던진다. 사장님이 요즘 꽂혀 있는 기획안 A의 제출일을 늦춰 달라거나, 부서의 화합을 위해 일을 안 하고 놀기만 하는 워크샵을 가겠다거나 하는 식이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제안이지만 이때 아니면 이런 말조차 잘 꺼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기분에 따라 급변하는 사장님의 반응이 무섭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소라면 당연히 까일 이런 부탁들은, 사장님 기분이 좋은 날은 바로 YES를 받을 수 있다.


가끔 사장님과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 비서분이 자리에서 안 보일 때면 막막해진다. '오늘의 날씨 확인 안 하고 가면 큰일 날 텐데...' 분위기 파악 못하고 아무 말이나 내뱉다가 회사에서의 수명이 단축될 것 같기 때문이다. 

사장님의 앞 회의가 늦게 끝나 밖에서 무한 대기 중, 회의실에서 흘러나오는 고성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상사 기분 측정기'가 이 세상에 나온다면 시장 규모는 얼마나 될까... 일단 우리 회사에서는 필수적으로 로 1대는 공동구매 할 것 같고, 다른 회사 직원들도 관심 있으려나?라는 실없는 상상을 해보았다. 매번 소문에 의지하지 않고 사장님 기분을 바로 알 수 있는 AI가 있다면 유용할 것 같다. 가끔은 업무 능력 그 자체보다 그분의 기분에 따라 평가나 피드백이 달라지는 것 같아서이다. 


이런 상상은 사실 서글프다. 회사는 일을 하는 곳이고, 철저하게 내가 한 일 자체로 평가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만약 상사가 내가 한 업무 방식이나 성취도가 부족해서 나무라면 달게 받을 수 있다. 보고서를 마감시한 내에 작성하지 못했거나 차별화 전략이 없거나, 사전조사가 미흡했거나 하는 경우 말이다. 상사가 나의 이런 점을 지적한다면 사실 옳은 지적이고, 개선을 위해 노력할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업무의 질보다는 상사의 그날의 기분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면? 일단 그 평가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것이며 업무를 개선하기보다는 상사의 기분을 맞추는데 더 초점을 맞출 것 같다. 


절대 나는 이런 상사가 되지 말아야겠다 다짐해 본다. 그러나 한편 나도 내 기분대로 팀원들을 대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뜨끔하기도 하다. 누군가 회의할 때 내 기분을 물어봤던 것 같기도 한데... 그날은 압박받고 있던 잘 안 풀리는 업무 때문에 얼굴이 죽상이었을 것이고, 나와 의논하기 위해 찾아온 팀원들은 내 표정만 보고도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라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내로남불이었구나. 

평소 감정보다 업무에 초점을 맞춰 소통한다고 생각한 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감정을 한편에 밀어 놓고 제법 프로페셔널하게 대처하고 있다 믿었다. 특히나 팀원들 앞에서는 가급적 감정 표현을 자제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나의 관점이었고, 팀원들의 관점에서는 다르게 보였을 수 있다. 팀원들이 내 감정 기복 때문에 힘들어 상사 기분 측정기에 매번 내 이름을 대입해 사용한다고 상상해 본다.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고 반성하는 마음이 올라온다.


그 반성하는 마음으로 오늘의 팀 회의를 잘 시작해 봐야겠다. 팀원 중 누군가 내 눈치를 본다면 바로 알아차리도록 나도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열어 놓으리라. 조금 더 팀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업무에 대한 기준으로 소통하리라 마음먹어본다.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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