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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Dec 13. 2023

남편에게 고맙다고 말해봤다

가족에게 건네기 참 어려운 그 한마디

연말을 조금 더 알차게 보내기 위해 리추얼을 계획하고 시작했다. 

지난주부터 '연말 질문 & 대답하기'를 친한 언니와 같이 하고 있는데, 노션을 통해 매일 다른 질문을 올리고 각자 대답하며 서로 댓글로 응원하는 형태이다.


지난주에 주어졌던 질문 하나는 '올해 가장 감사한 사람은 누구인가?'였다.

 질문을 받고 나는 머릿속에 여러 사람들이 그려졌다.

노미네이션 된 여러 후보들 중에 나는 누구에게 가장 감사했지?라고 골똘히 답을 생각하다가, 내가 놓친 한 사람이 불현듯 생각났다.


바로 우리 남편.


생각해 보니 올해 누구보다도 감사해야 사람은 나와 같이 살고 있는 나의 가족, 그중에서도 자신의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해서 가정의 행복과 안녕을 책임지고 있는 남편이었다.

평소 너무 당연하다 생각해서 느끼지 못했던 그에 대한 고마움이 마음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와, 쑥스럽지만 용기 내서 남편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늦은 시간에 퇴근을 해 집에 도착했는데, 아이에게 저녁을 차려주고 설거지와 청소까지 마친 후 이제 막 한숨 돌리려고 하는 그의 모습이 평소보다 더 짠해 보였다.

나는 남편에게 다가가 말했다.


"여보, 시간 되면 잠깐 얘기 좀 해."


남편은 5초 정지 모드였다.

그의 흔들리는 눈빛과 얼어붙은 표정을 오래 같이 산 아내의 독심술로 읽어보았을 때, 다양한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대답했다.


"왜, 뭐 할 말 있어? 갑자기 무섭게 왜 그래?"


아, 우리의 대화와 소통이 이렇게나 단절되었었다니.

회사에서 사람들한테 맨날 소통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 나부터 잘하자, 더 이상 잘난척하지 말자라는 역지사지의 마음이 갑자기 확 들었다.


나의 짐작뿐이지만 아마도 내가 대화를 시도한 그 순간 남편은, '이 여자가 뭘 잘못 먹었나, 내가 자기 몰래 산 자전거 고글을 알아차린 건가, 아니면 맨날 노래를 부르던 퇴사를 지금 선언하는 건가?'라는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어찌 되었건 나는 오늘 대화의 목표가 명확했기 때문에, 대화의 도입부를 잘못 시도한 나의 잘못을 쿨하게 인정하고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내가 무섭게 얘기를 시작해서 미안해. 오늘은 갑자기 여보에게 고맙다는 마음이 들어서 표현하고 싶었어. 올해 이사라는 큰 일도 혼자서 다 해줬고, 매일 칼퇴해서 집안일도 혼자 다 하는데 내가 그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


이 말은 순도 100%의 나의 진심이었다.

우리 가족은 올해 8월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했는데, 내가 한 것이라고는 이사 당일날 아이를 데리고 무더위를 피해 시원한 카페로 가있었던 것뿐이었다. 새 집 계약부터 인테리어 등 사소한 것부터 일까지 모두 이사와 관련된 것은 남편이 알아보고 직접 발로 뛰며 혼자 그 어려운 업무를 다 해냈다.


나는 마치 사장님처럼 그가 엄청나게 검색해서 알아본 가구 색깔이나 디자인을 평가하고 최종 결정하면서, 너무 머리 아프니 제발 알아서 고르라고 얘기했다.

결혼부터 가난하게 시작한 구닥다리 살림살이를 청산하고 드디어 새 가구와 가전을 들여놓을 설렘에 부푼 그에게, 돈을 아끼자며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3대 이모님이라는 건조기,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를 사자고 하길래 우리가 그게 왜 필요하냐고, 사람이 하면 되는 일을 기계에게 맡기면 어떡하냐며 나는 그에게 망언을 서슴없이 퍼부었다.





맞다. 그동안 모든 집안의 대소사는 여태껏 그가 다 챙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공기처럼 당연하게 생각해, 고마운 줄도 몰랐다.


주말부부, 아니 이산가족생활을 오래 한 것이 미안했던 남편은, 10년 넘게 다닌 평생직장이라 불리는 곳을 그만두고, 가족을 위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아이를 데려와 살림을 합친 후 도우미 이모님이 하도 구해지지 않자, 직장 바로 옆에 살면서 본인이 도우미를 자처했다.

아이가 아프면 바로 달려간 것도, 아이의 저녁을 챙겨 먹인 것도, 학원 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아이를 꼬드겨 같이 배드민턴을 치러 다닌 것도 바로 남편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들어와 이미 다 모든 집안일과 문제가 해결되어 있는 우리 가족의 일상을 제삼자처럼 지켜보기만 했던 것 같다.


남편이 없었더라면, 내가 워킹맘으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을 좋아하는 나를 배려해 그는 나를 직장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


남편은 사실 결혼 전 아이와 집안일을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데이트를 할 때 아이들이 다가와 장난치면 저리 가라며 손사래를 쳤고, 기숙사에 사는 그의 방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그런 그가 지금 이렇게 변화한 것을 보면, 얼마나 노력을 많이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 조금 짠하다.





나의 진솔한 감사의 말에 남편은 화답한다.


"그렇게 고마우면, 앞으로 네가 다 하면 되겠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저렇게 대답하니 정말 한 대 때리고 싶다.

남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삶에서 장난을 놓지 않는, 진지한 말을 조금이라도 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도 어이없이 따라 웃으며 말한다.


"아니, 너무 고마우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장난으로 화답했지만, 나의 계속되는 질문 공세와 잔소리 협박에 못 이겨 남편은 속내를 털어놓는다.

네가 고맙다고 얘기해 주니 좋다고.

집안일할 때 힘든 것도 많았지만, 가족을 위해 사는 삶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며 묵묵히 말하는 남편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든든해 보인다.


새삼 깨닫는 사실이지만, 정말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누군가의 의식적 노력으로 한 가정의 평화가 지켜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앞으로는 나의 감사를 원가족인 엄마 아빠에게도 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며 글을 마친다.


PS. 배경 사진 설명 -  장풍 컷을 하나 건져보겠다고 즐겁게 놀고 있는, 아니 아빠와 놀아주고 있는 아이가 포인트임. 장난꾸러기 아빠와 그런 아빠와 친구처럼 지내고 있는 우리 가족 모습을 반영한 이 사진이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우리 가족만의 사진이다.


#글루틴 #팀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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