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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Dec 25. 2023

우리 집 크리스마스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건 과연 게임일까 도박일까

나는 크리스마스를 너무 좋아했다.


내가 6살 때 아빠가 장롱 안에 숨긴 귀여운 오리인형을 받은 순간부터,

나의 6살 딸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머리맡에 살포시 놓아준 선물을 보며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때까지는...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한 달 전부터 캐럴과 트리, 반짝이는 전구로 시작해 설렘과 선물을 가져다주는 멋진 날이었다.

생일보다 크리스마스가 더 기다려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미드에서 봤던 산타할아버지는 북극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 같았고,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당연히 있다고 믿었다.


성인이 되어 현실에 치이며 크리스마스에 대해 설렘이 살짝 줄어들 무렵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 가족은 다시 몇 년간 아이를 위해 합심하여 크리스마스 환상을 만들어 주었다.


비록 나뭇잎이 빠지고 냄새가 나는 싸구려 제품이었지만 집안에 트리도 설치하고, 반짝이는 전구를 틀고 다 같이 빨간색 옷을 입은 채 몇 시간이고 전구를 바라보며 캐럴을 부르기도 했다.

울고 떼쓰다가도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주실까 봐 울음을 뚝 그치는 아이를 보며 귀엽고 사랑스럽다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기뻐서 팔짝 뛰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이 부모로서의 낙이었다.






우리 집 크리스마스 설렘의 유효기간이 끝난 건 나의 잘못된 '고객님 마음 읽기' 때문이었다.

평소 섬세하게 딸의 마음을 잘 읽고 있다 자부해 왔고, 이때다 싶어 그녀가 평소 즐겨 보았던 로보카 폴리의 변신 인형 3종을 골라 몰래 포장해서 머리맡에 두었다.


25일 아침 눈을 뜬 7살 딸은 일어나자마자 포장을 뜯어보고 소리쳤다.


"엥? 이게 뭐야~~~~~~~ 산타할아버지한테 소원 빌었는데?"


그녀의 울먹이는 표정과 산타를 향해 외치는 멘트를 보니, 이번 선물 증정식은 그야말로 망했다고 직감했다.


사실, 로보카 폴리 인형도 중고장터에서 싸게 산 바람에 제대로 된 박스도 없어 나의 포장 실력으로 그나마 그 실체를 감추고 있었던 거다.

장난감들이 왜 크리스마스만 되면 죄다 비싼 패키지로 출시되며 게다가 인기가 많은 건 품절인 건지.

똑똑한 소비를 하기 위해 무려 중고장터를 이용한 건데, 선물 선정부터 망할 줄이야...


결국 꺼이꺼이 우는 딸을 달래, 어떤 선물을 갖고 싶다고 산타할아버지에게 소원을 빌었는지 물어보니 정말 구체적으로 대답한다.


"엄마 나는, 털이 보슬보슬하고 안으면 엄청 폭신한데 너무 예쁜 핑크색인 그 쿠션을 갖고 싶었어"


아뿔싸.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 나왔다. 나는 사지선다 객관식 문제 안에서 답을 하나 찍은 건데, 문제 출제자의 의도는 창의적인 주관식 답변을 요하는 것이었다.

이러니 내가 맞출 턱이 있나... 그러게 엄마가 일주일 전에 산타할아버지로 빙의해 물어봤을 때 답을 해주면 좀 좋아!

엄마는 주입식 교육의 피해자라고 나 혼자 허공에 외쳐봤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산타할아버지에 대한 환상이 깨진 이후, 우리 집 크리스마스는 점점 더 무미건조 해지기 시작했다.

코로나를 지나며 산타할아버지는커녕 집에 손님 한 명 찾아오지 않던 어느 날 오후, 장난과 재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편이 지루함을 못 견디고 먼저 제안했다.


"우리 이번 크리스마스는 다 같이 뽑기를 해서 선물을 정하자."


한 번도 가족회의라는 걸 해본 적이 없던 우리 가족은 이날 정말 진지하게 뽑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 선물의 범위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머리를 맞대고 논의했다.

정신연령대가 아주 비슷한 아이와 남편이 아이디어를 모으니 정말 다양하고 신선한 의견들이 나왔다.


우선 종이에 각자 선물 종류를 3가지 쓸 수 있는데, 첫 번째는 3천 원 미만으로, 두 번째는 3만 원 미만, 세 번째는 통 크게 10만 원 미만이다.

첫 번째 3천 원 미만 선물은, 상대방이 절대 원하지 않을 것 같은 '쓸데없지만 웃긴 선물'이어야 하고 이 선물을 뽑은 사람은 반드시 밖에서 이 아이템들을 착용해야 한다는 규칙도 만들었다.

이날 선물 후보로 나온 것들은, 헬로키티 캐릭터 선글라스, 물고기 모양 슬리퍼, 가짜 수갑, 얼굴에 쓸 수 있는 스타킹 등등이었다.


대망의 크리스마스날, 우리 가족은 비장한 각오로 뽑기에 임했다.


"꺅~~~~~나는 1등 뽑았다!"


좋아서 소리를 지르는 딸과 달리, 나와 남편은 각각 스타킹과 헬로키티 선글라스 당첨.

지지리 복도 없지, 산타할아버지는 왜 다 큰 어른 소원은 무시하신담?


빨리 아이템을 구매해서 밖에 나갔다 오자 말하는 딸을 겨우 설득했다.

엄마 아빠는 이 정도는 다 착용하고 외출할 수 있는데, 그럼 그 옆에 서있는 네가 더 쪽팔릴 거라고...

휴우. 겨우 넘어갔다.




2023년의 크리스마스인 오늘은, 남편의 아이디어 제안으로 더 큰 게임판이 벌어질 예정이다.


우리 집에 잠들어 있던 모든 보드 게임을 동원해, 총 6가지의 게임을 펼친다.

루미큐브, 초성게임, 스플렌더, 오목, 도블, 할리갈리 등등.


이번 크리스마스배 가족 게임의 판돈은 작년보다 더 커진 총 30만 원.

한 게임당 승자독식으로, 1등을 한 사람이 5만 원씩 가져가는 형태라고 한다. (사실 나도 통보를 받았을 뿐이다)


이제 초등학교 졸업을 4일 앞두고 있는 딸이 걱정스레 물어본다.


"아빠, 이 정도면 게임이 아니라 도박 아니야?"


이런 질문을 들으면 부끄러울 만도 할 텐데, 이미 경쟁심에 불타오른 남편은 아이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왜, 네가 질 것 같으니 무서워서 그래? 쫄보냐~~~~"


아... 우리 집 크리스마스 전통은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하지만 나도 딸의 지적에 부끄럽기보다는, 어젯밤에 잘 때 둘 몰래 스마트폰에 오목 게임앱을 깔고 승부욕에 더 불타올랐다.

비록 내리 세 판을 져서 게임을 다른 종목으로 바꿔야 하나 고민했지만.


뭐, 게임이면 어떻고 도박이면 어떠랴.

크리스마스를 핑계로 우리 가족이 다 같이 웃으며 즐겁게 같이할 수 있는 추억이 또 하나 쌓이기를 희망하며 이 글을 마친다.


#글루틴 #팀라이트


PS. 만약 내가 1등을 한 번이라도 하면, 후기를 적어볼 예정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 글로 크리스마스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산타할아버지 제발 이번에는 저 좀 도와주세요!


아참, 나에 대해 오해하실까봐 내가 원래 좋아하고 꿈꿔왔던 크리스마스 사진을 추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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