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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Feb 21. 2024

영어병에 걸린 외국계 회사원 이야기

한국어 능력도 같이 잃어버린 듯

외국계 회사에 다닌 지도 벌써 10년이 넘어가고 있다.

환상과 동경으로 시작된 외국계 회사 생활은, 이제는 오래되어 당연함으로 자리 잡은 느낌이다.

그런데 얼마 전 동료들과 일상적인 회의를 하다가, 문득 내가 느끼는 당연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당연함이 아닌 당혹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주최하는 회의가 아닌 경우 말하지 않고 관찰할 기회가 생기는데, 이때 처음으로 이 현상을 포착했다.

일명 외국계 회사원영어병 증상.


회사에서 자주 보일 수 있는, 영어병에 대한 나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문장에서 영어를 최소 30% 이상 섞어서 말한다.

 예시) "Supply issue 없도록 global team이랑 다시 communication 해서 내일까지 confirm 해주세요."

 주석) 한글로 해도 되는데 나도 모르게 영어 단어가 자꾸 끼어든다. 이건 무의식의 세계라 쉽게 통제 불가능하다.


2. 한글 대신 영어 단어 사용이 편할 때가 있다

 예시) "지금 이 고객사에 우리의 value proposition이 제대로 안 돼서, customized strategy를 다시 논의해야 할 것 같아요."

 주석) 영어 단어를 굳이 한글로 바꾸면 맛깔나지가 않다. 영어를 써야 나의 의사가 조금 더 잘 전달될 것 같다.


3. 영어로 된 약어를 남발한다

 예시) "Q1 FCST는 내일 EOD까지 submission 해주세요."

 주석) 신입사원에게는 이 문장은 외계어 같은 느낌일 것이다.




사실 나는 오래된 고인 물이라 너무 익숙해 잘 몰랐다. 

하지만 회의를 하다 보니 대화 속 문장에서 영어 단어와, 영어로 된 약어들이 많이 들리는 게 아닌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신규입사자, 특히 외국계 경험이 처음인 신입사원이라면 엄청 당황스럽겠다 싶었다.

업무 용어도 낯설 텐데 이걸 영어로 쏼라쏼라 하고 있으니... 아니지, 이걸 또 줄여 영어 약자로 얘기하고 있으니 더 알아듣기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되돌려 내가 처음 외국계 회사를 왔을 때를 떠올려보니, 나도 마찬가지였다.

shipping date를 선적일이라고 표현하면 되는데. 이렇게 영어를 쓰는 게 이해되지 않았고 어이가 없었다.

EOD와 EOB를 얘기하는데, 이미 내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가서 들리지도 않았다. (*EOD-End of Day, EOB-End of Business Day)

결론적으로는, 외국계 회사원들은 영어를 남발하는 영어병 환자처럼 보였다.


그리고 10년 차 외국계 회사원이 되어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영어병에 심하게 감염되어 있음을 느낀다.

익숙한 환경에서는 잘 모르다가, 집에 가서 가족들과 얘기하다 보면 바로 깨닫게 된다.

남편과 아이는 이런 나를 가끔 지적질하기 때문이다. 잘난척하지 말라는 일침으로 말이다. (쓰고 싶어서 쓰는 게 아니고, 이제 무의식의 세계 때문에 그냥 나온다고 변명해 본다....)


영어병에 걸려보니 가장 안 좋은 점은, 바로 비루해진 한국어 실력이다.

가끔 말을 할 때 한국어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단어뿐만이 아니라 문장도 마찬가지이다.

젠장.... 영어라도 유창하게 잘하면 괜찮을 텐데!

이건 뭐 영어 능력은 안 늘고, 한국어 능력만 줄어들어 크게 손해 본 느낌이다.


'I'm 신뢰에요 - 회사편' 

내 언어 능력은 딱 요정도랄까? 이 문장을 보고 차마 웃지 못하는 슬픈 현실....




퇴화하고 있는 나의 한국어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오늘의 글에 대한 마무리를 해본다.

나는 오늘 글에서, 나를 포함한 외국계 회사원들의 영어 사용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의도가 전혀 아님을 밝힌다.


결국, 회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소통이다.

영어로 말하던 한국어로 말하던, 말하는 것의 최종 목적은 소통을 통한 의사전달이다.


외국계 회사에서는 다른 나라의 직원들과 소통할 기회가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어를 많이 쓰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습관화되면 한국 직원들과 소통할 때도, 영어가 섞일 수밖에 없다.

회사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업무 용어가 영어 단어라면, 당연히 영어로 말하는 것이 의사 전달도 명확하고 효율적일 것이다.


다만, 의사소통은 쌍방이기 때문에, 말하기 전에 상대방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한국 고객과 얘기하는데 회사에서만 쓰는 영어 단어를 사용한다면, 배려가 전혀 없는 것이다.

소통의 상대방, 즉 청자를 우선시해서 그들이 가장 잘 이해하기 쉬운 언어, 단어로 바꾸어 말하는 연습을 계속해야 한다.

이것은 비단 회사뿐만이 아니라 모든 소통에서도 적용되는 기본일 것이다.



영어병을 당장 고치기는 힘들겠지만, 조금이라도 의식하고 더 좋은 한국어 단어를 떠올려봐야겠다 살짝 결심해 본다.


#글루틴 #팀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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