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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Aug 07. 2024

퇴사를 못한 건 에어컨 바람 때문이었어

퇴사가 마려운 요즘

머리 아픈 회의를 연거푸 하다 보니 답답증이 도진다.

답도 없어 보이고 뭘 어디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하나도 모르겠다. 마라톤 회의를 다 끝내고 내 자리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었는데, 바로 다시 닫고 싶어 진다. 쌓여 있는 미해결 이메일은 여전히 많고, 죄다 '긴급회신요망' 표시가 붙어 있다. 복잡한 회의 내용도, 복병처럼 숨어 나를 기다리던 업무들도 모두 나를 옥죄어오는 사슬같이 느껴진다. 회사라는 감옥을 탈출하는 도비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대리 만족을 해보지만 역부족이다. 역시 이럴 땐 환경을 전환해줘야 한다. 스트레스 유발 물질로 가득한 사무실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괜찮아질 것 같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약간의 설렘이 있었던 것 같다.

산책을 하면서 안구정화도 하고, 머리도 깨끗이 비우고 와야겠다는 결심과 함께 말이다. 점심도 도시락을 먹으면서 회의를 했는데, 그러느냐 바깥 구경을 못한 나에게 주는 보상 시간이기도 했다.  

초록색 나무가 만드는 그늘 아래를 걷다가 시원한 한 줄기 실바람이 불어오면 상쾌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유난히 파란 하늘도 보고, 매미 소리도 들으며 자연을 느끼고 싶었다. 나의 고민을 훌훌 날려 버리고 올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소망은 순진한 망상이었다는 것을 곧바로 깨닫게 된다. 현관문을 열고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아,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은커녕, 무더운 공기가 습기를 머금고 피부에 진득하니 달라붙는다.

바깥이 이렇게 더웠던가? 사무실 안에서 에어컨 바람만 쐬고 있으니 전혀 알 턱이 없었다. 심지어 에어컨 바람이 많이 나오는 자리에 앉으면 한기가 느껴져 늘 겉옷을 챙겨 오곤 했다. 으슬으슬한 기운이 들면 냉방병에 걸렸구나 직감하기도 했고. 38도 더위는 뉴스 기사에나 나오는 숫자일 뿐이며, 여름철 사무실 체감 온도는 늘 20도 초반이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불쾌지수가 급격히 치솓는다. 아스팔트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도 보이는 것 같다. 안 되겠다, 상쾌한 기분을 느끼려다 불쾌함만 남는 산책을 할 것 같아 다시 사무실로 발걸음을 돌린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퇴사를 결심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에어컨 바람 때문이구나.'

회사 안은 전쟁터, 회사 밖은 지옥이라는 문구가 겹쳐진다. 내가 만약 회사에 계속 있으면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한가하게 냉방병 걱정을 하고 있겠지. 그러나 회사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글거리는 태양과 후끈거리는 공기 그리고 가끔 퍼붓는 소나기를 날것 그대로 경험할 것이다. 

에어컨 바람이 주는 상쾌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이 무더위에 밖으로 나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디 에어컨 바람뿐이겠는가. 회사에서 꼬박꼬박 주는 월급과, 높낮이 조절이 되는 책상, 아침마다 제공되는 시리얼은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이 모든 것들이 없어진 삶을 잠시 상상하다가도, 얼른 고개를 휘져으며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도 올라온다.

더위를 무서워하며 지레 검먹어, 제대로 경험해보지도 못하고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나 자신이 답답하다. 어쩌면 이미 몇 년 전의 퇴사와 백수생활로, 더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가 알게 되어 더 두려운가 싶기도 하다. 

내 열정은 늘 저 무더운 회사 밖에 있는 것 같아 기웃거리고 있지만, 나는 오늘도 결국 에어컨 바람이 쌩쌩 나오는 사무실로 다시 들어오고야 말았다. 현실과의 타협인 것 같아 조금은 쓸쓸해진다. 그리고 자꾸 퇴사가 마려워진다.

에어컨을 끄고 밖으로 당당하게 나가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열대야가 무서워 에어컨을 틀고 글을 쓰는 밤이다.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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